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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Aug 16. 2020

한달에 얼마면 살 수 있어?

몹시 불안했던 날, 내가 했던 것 

그런 날이 있다. 

내 인생이 깨진 컵처럼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 

조금만 발을 잘못 디디면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조각에 베일 것 같은 날, 

딛고 선 자리가 순식간에 바닥도 없이 꺼져버릴 듯 무서운 날.

그 즈음이었다. 

너는 누구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생각했다. 


네, 저는 마흔을 갓 넘긴 일하는 싱글여성입니다. 


제일 먼저 떠올라버린 문장에 좀 소스라쳤다. 

나를 설명하는 말의 빈약함에.  그 초라함에. 

되게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왜 손에 쥔 것은 없는지.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데, 체력도 열정도 '예전같지 않다'는 자각이 가슴을 쳤다. 


도대체 무서운 게 뭐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알았다. 그 두려움의 정체, 불현듯 나를 옥죄어 왔던 그 날선 공포의 이름은,

'생존'이었다. 


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경험이 많아질수록, 

나는 점점 앞으로 잘 생존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아마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아버렸기 때문이리라. 인생이 얼마나 가혹하고 냉정한지,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들이닥치는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 순식간에 부서져내리는지. 

생존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인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잘 살아남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 순간 모든 것은 엉망이었다. 그냥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 즈음 오랜만에 만난 동창은 이렇게 말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단란한 가족을 이룬,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분명해서 실제 나이보다 열살은 어려보이는 그녀가 세팅된 머리카락을 넘기자 보석박힌 귀걸이가 달랑거리며 반짝!했다. 

그녀가 가진 것들. 진짜 다이아몬드와 많은 돈. 


마흔 넘은 인생에 뭐가 있니?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어.


와우.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한껏 꾸민 외모만큼이나 강렬한 허무. 

(부유함이 공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순간 꽤 직접적으로 목격했던 것 같다.)

나는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해야 할 게 많았다. 이룰 게 많았다. 가져야 할 게 많았다. 

그만큼 해 놓은 것도, 이루어놓은 것도, 가진 것도 없었으므로(없다고 느꼈으므로).

나는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는 사십대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앞으로도 많은 계단을 올라야 했을 뿐 아니라, 

매일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노후를 대비할 돈을 벌고 모아야 했고, 

돈을 벌 수 있는 노동을 (적어도 당분간은) 계속할 수 있을만큼은 건강해야 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나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비용을 계산해보았다. 

나의 한계를 가늠해보는 작업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얼마만큼의 돈이 나를 얼마동안 생존하게 해 줄 것인가. 

나는 무엇이 없이도 살 수 있는가, 또한 무엇이 내 생존에 제일 필요한 요소인가. 

최소의 생존비용을 알고 있으면 용기가 생긴다고 누가 그랬다. (아마 팀 페리스였던 것 같다.)

최대한 망해봤자 이 정도라면, 이만큼은 도전할 수 있는 거 아냐? 하면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몰두해서 적었다. 그러면서,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알았다.

사람마다 다를 생존의 우선순위. 

제일 먼저 적은 건 커피값이었다. 아하, 카페인이 내 생존의 기본연료였군. 

그 다음이 휴대폰 요금이었다. 연결되어야 뭐라도 할 수 있겠지. 

 

아래는 대강 옮겨본 내 최소한의 생존비용이다. (개인적인 몇가지 사정에 따른 비용은 제외/각색했다.)


커피 45,000원 (1,500*30)
휴대폰요금 66,000원 (33,000*2 / 나는 휴대폰 두대를 쓰는데, 그건 유지해야 할 것 같다.)
보험료 100,000원
TV,인터넷,가스요금 60,000원
관리비 200,000원 (계절마다 차이는 있지만, 평균하면 이 정도.)
교통비 120,000원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인터넷영어강의 20,000원 (가능하면 이 루틴은 유지하고 싶다.)
식비 등 생활비 300,000원 
Total  911,000원 


물론 대강의 금액이다. 국민연금 등 포함되지 않은 많은 돈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피치 못할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한달 백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살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서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것도, 매일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휴대폰을 두 대 다 유지하면서 말이다. 책을 사지는 못하겠지만 도서관과 서점이 있다. 옷과 가방과 신발은 그동안 사놓은 것들로 어쨌든 충분할 것이다. 의외로(?) 나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왔구나 싶었다. 막연하게 무섭기만 했던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나는 생각보다 오래 버틸 수 있겠다 싶었다. 몇번의 도전과 실패가 되풀이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불안감은 내 삶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질 때 찾아온다. 그러므로, 최소 생존비용을 계산해보는 것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며 내가 내 인생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힘과 권위를 가져다 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경계를 알게 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정말 그렇다. 

버는 돈은 내 통제력을 벗어날 수 있지만, 내가 쓰는 돈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 그건 생각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게다가 버는 돈은 세후지만 쓰는 돈은 세전이다. 다시 말해 천원을 더 버는 것보다 천원을 더 아끼는 것이 이득이라는 뜻이다. 미래의 청사진은 현재의 경제적 통제력(그리고 검소한 생활)과 결합될 때 시너지가 난다고 믿는다. 그저 한달 동안 얼마만큼의 돈으로 살 수 있을까를 노트에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용기를 얻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처음 최소생존비용을 계산한 게 삼년전쯤이다. 

그때보다 나는 나이를 더 먹었고, 여전히 가끔씩 찾아드는 두려움에 소스라치곤 한다. 여전한 그 목소리가 묻는다, 낮고 음울하게. 


살아남을 수 있니, 너? 


그럴 때마다 적어본다. 내 한계를, 내 우선순위를, 한달에 얼마정도면 살 수 있을지, 그렇게 얼마를 버틸 수 있을지. 지금 내가 가진 대단치 않은 돈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감당해줄 수 있는지, 그리고 나는 알게 된다. 그 시간이 의외로 길다는 것, 그 시간이 감당해줄 나의 도전이 의외로 많고 크다는 것을. 그리고 나면 늘 그랬듯이 안심이 찾아오고 나는 다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그 낮고 음울한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비록 어느 예기치 못한 순간, '나 여기 있어'하며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충분히 괜찮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십분이면 충분하다. 또한 다행스럽게도, 

아마 당신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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