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를 견디는 하나의 방식
얼마전 선배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 저는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좀 꾸역꾸역, 루틴에 기대어 살아보려 해요.
슬럼프가 찾아온 건 올여름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 그리고,
가끔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짜증!
이래봤자 뭐가 달라져?
다 싫어! 다 꼴보기 싫어!
어김없이-또한 당연하게도- 신체적 무력감이 함께였다.
머릿속이 뿌옇고 팔다리가 무거웠다. 일어날 때마다 끙! 앓는 소리가 튀어나오고, 무릎을 짚으며 계단을 올라야 했다. 슬럼프.... 이유를 알 수 없는, 혹은 어떤 이유를 붙이더라도 완벽하게 들어맞는 동시에 뒤틀어지고 마는 어떤 것. 그런데 이상하게, 깊은 어둠 속으로 내쳐지면서도 나는 아주 희미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안 깊은 곳에서 가냘프게 빛을 내는 '희망'과 닮은 어떤 감정. 그것은 이렇게 말했다.
기억해 봐. 너는 이전에도 비슷한 것을 겪어본 적이 있어.
그랬다. 나는 이와 유사한 증상을 겪어본 적이 있다. 그것도 꽤 여러번.
그러니 당황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대처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나이듦의 축복은 이런 때에 발휘되는 것일까. 그 길을 걸어봤다는 것, 그래서 그 길이 비록 예상보다 길고 험난할지라도 결국은 끝이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저 묵묵히 걸어가면 된다는 것, 그러면 어느 날 내딛는 다리가 더 이상 무겁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고 그때 보이는 풍경은 예전같지 않다는 것.
이십대와 삼십대에 겪었던 슬럼프'들'의 혹독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는, 다시는 그 어두운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서 어린 나는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술, 헛된 만남, 냉소, 자학, 나태, 불면, 폭식, 공격적인 말들, 수동공격... 이 모든 것들은 전혀 효과적이지 못했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할퀴어 흔적을 남겼다. 그런 좌충우돌과 시행착오 끝에 나는 마침내 슬럼프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며 또한 유일한 무기를 발견했다.
그것은 '루틴'이었다.
일상을, 하던 대로, 무심하게, 이어나가는 '습관'. 그저 매일 하던 일을 한다. 그냥 내가 하기로 한 것을 한다. 대단한 계획이나 목표 같은 것은 필요없다. 생산성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 나머지 시간은 흐르는 대로. 그저 이 슬럼프의 끝에서 부서지지 않은 나와 재회할 수 있기 위한.
규칙적인 생활, 특히 아침의 루틴을 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시작은 '정해진 시간에 일찍 일어나기'이다.
(여러분은 서점에서 '모닝루틴', '미라클 모닝' 등에 대한 수많은 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유용했던 책은 <변화의 시작 5AM 클럽>(로빈 샤르마, 한국경제신문사)였다.
필요하신 분들께 도움이 되면 좋겠다. 언젠가 나의 모닝루틴을 이곳에 좀 더 자세히 써 볼 생각이다.)
현재의 아침루틴이 정리가 된 건 작년 여름 무렵이다. 2년간이나 질질 끌던 프로젝트가 무참히 엎어졌던 그때.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것 같은) 실패와 불운(으로 보이는)의 그림자에 몸서리치면서, 거대한 슬럼프가 나를 향해 (또!)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말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번의 슬럼프에 잘못 휘말리면 자칫 내 남은 인생이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고개를 처들었다. (다행스럽게 당시의 내게 그 정도 생존본능은 남아있었다!) 절망의 낭떠러지 앞에서 마지막 발을 내딛기 직전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변화의 시작 5AM클럽>을 샀고, 다음날 새벽 다섯시부터 (강제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졸렸고, 피곤했고, '이게 무슨 짓이야' 하는 회의감이 수시로 들었지만...
아무튼 나는 계속했다.
계속하는 것 말고는 지금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프로젝트를 되살릴 수는 없어도, 떠나간 애인을 돌아오게 할 수는 없어도, 나는 매일 아침 내가 정한 시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유일하게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찍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 일단 일어나기만이라도 하자, 라고 나를 다독였다. 눈만 뜨고 소파 위에서 한시간을 버티고 다시 잠들기도 했다. 새벽 다섯시부터 여섯시까지- 그 한시간 동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그리고 나면, 비록 내가 한 일이 고작 새벽 다섯 시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에 불과했을 지라도- 놀라운 성취감이 찾아왔다.
나는 해냈다. 나는 해낼 수 있다. 새벽 다섯시에 눈을 뜰 수 있다면 다른 것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내가 결정할 수 있으니 인생의 다른 일들도 해볼 만할 것이다.
매일 아침 느끼는 성취감에 나는 전율했다.
짜릿했다. 아침이 지나고 다시 다운되는 때가 많았지만, 뭐 어떤가, 내일 아침이면 또 그 짜릿함을 맛볼 수 있는데!
내 인생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효능감과 자신감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일어나는 게 점점 쉬워지자 하고 싶은 게 많아졌다. 일단 시간이 너무 많았다. 다섯시에 일어나면 하루가 엄청 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아침의 시간은 더 긴 것 같다.)
나는 각종 책과 동영상을 참조하면서 나만의 아침루틴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정리된 나의 아침루틴은 아래와 같다. 물론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고, 못 지키는 날도 있다. 사정에 따라 못지키는 날이 있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어간다. 다음날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압박감은 어떤 경우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5:00 기상
5:10 양치질, 유산균 먹기, 스트레칭
5:20 명상 (명상 어플 'calm')
- 커피 내리고 토스트에 빵 넣어두고 노트북 켜기
5:50 영어 인터넷 강의 (feat. 아침, 커피)
6:10 모닝저널 (간단하게 할 일 정리+감사한 일들)
때로는 산책을 하기도 하고 일의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일어나자마자 영어강의부터 켤 때도 있다. 배가 고프면 일어나자마자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기도 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톡으로 아침인사를 보내는 일과도 이 사이에 포함된다. 어느 정도 내게 재량을 부여하면서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려 한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일어나는 시간을 한두시간 늦추기도 한다.
아무튼 아침 루틴을 만들고 활용하기 시작한지 일년이 넘었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이며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군데군데 남아서 가끔 쓰라리긴 해도, 비교적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나가고 있다. 슬럼프가 또 시작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렇다, 매일 모닝루틴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도 슬럼프는 찾아온다!), 그것을 예전보다 훨씬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나를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이전보다 강하고 안정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력감과 우울이 내 머리위를 (또!) 뒤덮기 시작할 때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괜찮아. 나에겐 모닝루틴이 있잖아!
이 슬럼프가 끝날 때까지, 내가 루틴이라는 무기를 쥐고 버텨낼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내면 된다. 살던 대로,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무심하게, 때로는 꾸역꾸역, 매일의 아침을 지내면 된다. 일어나고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굽고 노트북을 켜고 명상어플을 열어 십분짜리 오늘의 명상을 플레이하는.... 그런 것들. 나를 지키고 유지하는 작고 사소한 행위들.
선배에게 보낸 말대로, 당분간은 그렇게, 루틴에 기대어 꾸역꾸역, 지내보려 한다.
불현듯 머릿속이 맑아지고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어느 순간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