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말은 보통 다정하지 않다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바쁜 그의 스케줄에 일방적으로 내가 맞춘 만남이었다. 그의 시간에 맞추어 그가 있는 곳으로 내가 가야만 겨우 성사될 수 있었던, 아주 구차하고 일방적인 만남…….
자존심의 크기로는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내가 ‘야, 됐어됐어. 너 아님 내가 만날 사람이 없을 줄 알아? 그리고 나도 너만큼 바쁘거든?’ 하고 말도 꺼내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미 그때 우리 사이의 균형추는 한참 기운 상태였던 것 같다. 나는 그가 너무 보고 싶었고, 동시에 내 안에서는 우리가 이미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과 의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듣기 좋은 말 좀 해봐."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간다.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참 잘생긴 눈썹이다.
“너 보기가 이렇게 힘드니까. 오늘 네 모습에 대한 기억으로 몇 달은 버텨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내 기억에 남을 말을 해. 제대로, 고민해서.”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채 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내 말 속에, 나에게 충분한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지 않는 그를 향한 힐난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모르는 척 하는 것일까. 늘 그런 식으로 그는 관계에 대한 질문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왔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뜻밖에 그가 한 말.
“정말 힘들 땐 누구도 옆에 없잖아. 네가 정말 힘들 때 내가 한 번은 꼭 옆에 있을게. 그때 나를 불러.”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을 하는 그는, 네가 정말 힘들 때 내가 네 옆에 있겠다는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다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말을 하는 그가 너무나 다정해서, 나의 경험상 다정한 말은 대부분 진실이 아니어서. 그러니까 그것은 그의 의도적인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그가 너무나 달콤하게,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과 딴판으로 했다는 측면에서의 거짓말이었다. 이 순간에는 아니나 언젠가는 거짓으로 판명될 말이라는 점에서.
그래서 그 순간, 나는 그 다정한 말에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지금 그의 진심을 기억하되, 기대하지는 말자. 이 말은 너무나 다정해서, 맛은 있지만 몸을 상하게 하는 질 나쁜 음식처럼, 기대해 버리면 나중에 그만큼 많이 실망하게 될 테니까.
예감처럼, 그 말은 정말 거짓말이 되었다.
‘내가 정말 힘들었던 순간’은 그 뒤에 예정된 수순처럼 찾아왔지만, 그때 그는 내 옆에 없었으니까. 그는 그때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바쁘게 자신의 삶을 짊어지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쉽게 연락이 닿지도 않았고, 나 역시도 적극적으로 그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물론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자주 그를 생각했다. 그가 남겼던 다정한 말을 기억했다. 네가 정말 힘들 때 내가 한 번은 꼭 옆에 있을게. 그때 나를 불러. 그는 왜 ‘한 번은’이라는 단서를 달았을까. 마치 써버리고 나면 없어지는 기회처럼.
그래서 나는 쉽사리 그의 자비를 이용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써버리면 더 힘든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의 카드는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지금은 어떻게든 버텨보자, 했다. 그렇게 두통약처럼 그의 다정한 말의 기억을 삼키면서, 순간순간의 고통을 넘어갈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자신이 했던 그 다정한 말을 기억하고나 있을지에 대한 확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그를 찾아가 힘든 손을 내밀었다면 그는 내 손을 잡아주었겠지. 그는 그래도 가슴이 따뜻한 남자였으니까. 그러니 내가 오직 나 혼자의 힘으로 힘겹게 진창을 헤어 나와야 했던 것에 대하여, 그의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말이 거짓말이 되어버린 이유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던 나인지, 마음 편하게 손을 내밀도록 틈을 보여주지 않은 그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또한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누군가 내게 ‘좋은 말을 꼭 그렇게 비틀어서 생각하는 네가 문제야’라 한다 해도 나는 변명할 생각이 없다. 이 정도로 대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정한 그의 말들이 훗날 칼날처럼 마음을 후볐던 적이, 당신은 없나요?
그냥, 저는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다정한 그의 말들이 훗날 칼날처럼 마음을 후볐던 적이, 당신은 없나요?
살다보면 일부러 무언가를 감추거나 속이려고 하는 거짓말보다, 그 순간에는 진실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의도치 않게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우리 삶을 더 많이 흔드는 것은, 아마 후자일 터이다.
* 이 글은 저의 네번째 책 <저지르고 후회해도 결국엔 다 괜찮은 일들> (예담(위즈덤하우스). 2014)에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