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을 읽는 100가지 방법

44. 내 맘에 제인 오스틴이 들어온 날

by 제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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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졸업하고 제주 시내에 있는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나는 학교 근처 하숙집을 얻어서 생활했다. 고2가 됐을 때는 혼자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이른 나이에 독립한 것이다. 나처럼 시청 근처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두 세명은 더 됐다. 그 중에 김OO 친구를 잊지 못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다. 중3때 학교 대표로 나간 수학경시대회에 나를 격려해 준다고 같이 따라와 준 친구이다. 수학경시대회가 끝나고 우리는 제주대학교 근처의 딸기밭으로 향했다. 딸기를 사오라는 어머니의 심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딸기밭 주인은 가져갈만큼 딸기를 직접 따라고 하셨고, 그 만큼 우리는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그 많은 딸기밭 중에서 우리가 고른 딸기밭은 우연히도 부모님과 인연이 있었던 곳이었다. 우리가 사는 마을 이야기를 하다보니 부모님 이야기를 하게 됐고, 통성명에 서로 알고 계신 분들이었다. 참 이런 우연도 있다니!


어린 시절의 딸기밭 추억 만큼이나 내게 강렬한 딸기밭은 제인 오스틴이 묘사한 딸기밭 장면이다. 소설 『에마』에서 에마 일행이 방문했던 돈웰 영지와 그 유명한 박스힐 소풍 장면을 어찌 잊겠는가. 박스힐 소풍을 위해 에마와 우드하우스 씨 등 나이틀리의 지인 분들이 돈웰 저택으로 모인다. 하지를 앞둔 여름날이었으니 딸기가 한창인 때였다.


"돈웰로 소풍을 오셔도 좋겠네요." 나이틀리 씨가 대답했다. "말이 없어도 올 수 있으니까요. 오세요, 그리고 저희 농장에서 키운 딸기를 좀 드시지요. 한창 익어가고 있거든요."(528)


돈웰의 저택과 영지를 둘러보던 에마 일행은 나이틀리 씨의 딸기밭으로 가서 딸기를 딴다. "행복의 도구를 빈틈없이 갖춘 엘턴 부인"이 나서서 딸기 이야기를 꺼내며 일행을 지휘하고 있다.


존 나이틀리의 기질에 다소 결함이 있긴 했어도 이저벨라는 나무랄 데 없는 집안과 인연을 맺었다. 그녀의 혼사로 인해 얼굴을 붉히게 될 사람이나 이름이나 장소는 전혀 생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져서 에마는 이리저리 거닐면서 그 기분을 만끽하다가 마침내 다른 사람들처럼 딸기밭으로 갔다. 곧 리치먼드에서 올 예정인 프랭크 처칠만 빼고 다들 모여 있었다. 커다란 보닛과 바구니까지, 행복의 도구를 빈틈없이 갖춘 엘턴 부인은 냉큼 선두에 나서서 딸기를 따고 받는 일이나 딸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지휘했다. 지금은 딸기, 오직 딸기만 생각했고 또 딸기 이야기만 했다. "영국 최고의 과일, 누구나 좋아하는 사시사철의 건강 과일이죠. 이 딸기들은 가장 비옥한 밭에서 난 최상품이에요. 직접 딸기를 따니 즐겁죠? 딸기를 진정으로 즐기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두말할 것 없이 아침에 따는 게 제일 좋아요. 절대 지치는 법이 없거든요. 모든 종자가 좋지만 오보에 종자는 타의 추존을 불허할 정도로 좋아요. 비교가 안될 정도죠....(536)


제인 오스틴에게 딸기는 각별한 과일이다. 그녀가 초턴에 살 때 어머니는 정원에 딸기를 키웠고, 다양한 딸기요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은 어머니가 만든 딸기 요리를 어떤 식기에 담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오빠의 부탁으로 식사를 차리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녀가 1811년 6월 언니 카산드라에게 쓴 편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월요일에는 잘 포장된 웨지우드 식기가 도착해 기뻤어. 아주 안전하게 잘 배달되었고 전부 다 어울렸어. 다만 올해처럼 수풀이 근사한 해에는 특히 잎사귀 무늬가 좀 더 컸으며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어. 어떤 무늬를 보니 버밍엄의 나무들이 황폐해진 것이 분명해...일요일에 완두콩을 따기 시작했는데 양아 아주 적어서 <호수의 여인>에서 모은 것만큼 되지 않아. 어제는 잘 익은 진홍색 딸기를 몇 개 찾아서 꽤 놀랐어.(162)-19세기 영국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웨지우드 식기 중에 산딸기 무늬의 찻잔이 있다. 제인 오스틴 살았던 시절에도 있었던 찻잔인지 가끔 궁금해진다. 만약 있었다면 제인 오스틴은 산딸기 찻잔을 매우 좋아했을 것이다.

image.png 웨지우드 찻잔(오른쪽은 산딸기 무늬 찻잔)


다시 나의 여고시절로 돌아가 보겠다. 같은 여고에 입학한 그 친구와 토요일 오후마다 제주시청 옆 버스정류장 앞의 한 서점에 자주 들렀다. 문제집을 사러가기도 했고, 읽고 싶었던 소설책을 보러 가기도 했다. 어느날 서점에서 그 친구는 내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추천해 주었다. 내 삶에 두 영국 작가가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소설은 제목부터도 눈길을 끌었다.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제목이었다. 독서광이었던 그 친구는 국어를 참 잘했다. 이렇게 일찍이도 그 유명한 영국 작가의 책을 닳도록 읽는 친구였으니 국어를 못할리가 없다.


친구는 종종 '펨벌리' 이야기를 했다. 내가 들었던 단어들 중에 유독 펨벌리가 오래 남은 이유는 분명 여러번 이야기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아시 씨의 저택 펨벌리는 주변의 멋진 풍경과 산책로로 유명하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훌륭한 도서관을 갖춘 곳이다. 독서를 좋아했던 친구였기에 펨벌리 저택의 서재에도 반했었던 것 같다. 자신이 그런 멋있는 서재를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나중에 내가 영문과에 진학하여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때마다, 그 친구가 왜 그토록 펨벌리를 닳도록 말했는지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운 시간이다.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에 대해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문징이니 말이다. 재산 있는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한 것일까? 젊은 여성들은 재산 있는 독신 남자를 반드시 만나려고 한다는 뜻일까? 딸 있는 가정에서는 재산이 있는 남자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뜻일까? 등등.


재산 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오만과 편견』을 좋아했던 그 친구는 당시에 아직 『에마』를 읽지 못했던 것 같다. 읽었다면 분명히 내게 추천해줬을 것이다. 그리고 딸기밭에서 딸기를 따는 동안, 분명히 에마가 어떻고, 나이틀리가 어떻고, 프랭크 처칠과 제인 패어팩스가 어떻다느니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과거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는 마법이 있다면 그 친구와 딸기를 따며 수다를 떨었던 그 시간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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