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by 제이오름

어린 시절 비오는 날이 그렇게 좋았다.

부모님도 잠시 농사일을 멈추신다.

처마밑으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 어떤 소리보다 맑은, 여유와 쉼의 음표였다.

그 누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난다.

모든 것이 다 채워질 날이 시작되니 절로 신이 난다.

어머니는 마당이 환히 보이는 부엌 옆 대청마루에서

술빵을 만들기 시작한다.

풀풀 날리는 밀가루가 사뿐사뿐 머리에 내려앉아도

흰눈이 소복이 쌓이는 것처럼 설레었다.

삐걱삐걱 울리던 마루 한켠에는

어제 만들어 놓은 보리 쉰다리가 말갛게 익어가고,

마당에 우뚝 솟은 한 그루의 복숭아나무 가지가 축축 처진다.

아버지가 따놓으신 두 구덕 복숭아는 어느새

솜털 안에 몰래 숨겨 놓은 햇살의 온기를 펼치며

말랑말랑 분홍빛 달큰한 향기를 퍼트린다

마당에서 뛰놀던 백구가 다가와

세차게 몸을 흔들며 비를 털어내도 찡그리지 않는다.

맑은 날 과수원을 돌아다니며 잘 보이지 않던 닭들도

축축한 돌담 위에서 날개를 단단히 여미고 몸을 웅크린다.

이따금 내는 꼬끼오 소리는

술빵이 익느라 덜컹거리는 찜통 뚜껑에 장단맞추는 소리.

고개를 들면 바로 보이는 과수원의 푸릇한 청귤들도

빗방울 소리에 춤을 춘다


이 때부터 알았다.

휴식은 고된 일에서 해방된 시간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조화로운 충만의 시간임을.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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