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신뢰할 수 없는 화자
제인 오스틴의 다른 소설과 결이 다르게, 악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 『레이디 수잔』을 꺼내들었다. 매력적이지만, 계산적이고 지능적인 사교계 여성, 수잔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것도 편지 형식의 글(epistolary novel)이니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중심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서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으므로 독자가 직접 탐정이 되어 행간의 의미를 찾아가면서 쏠쏠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잔 버넌이 쓰는 편지의 수신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녀가 친구 엘리시아 존슨에게 보낼 때와 시동생인 찰스 버넌에게 보낼 때 그 내용과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엘리시아 존슨에게 보낼 때는 매우 과감하고 뻔뻔한 태도로 자신의 본색과 사악한 계획을 드러낸다. "그 멍청한 녀석을 꼬시는 건 식은 죽 먹기였어"라고 말하는 등 자신이 남자들을 어떻게 유혹했는지 무용담처럼 털어 놓는다. 반면 시동생 찰스 버넌에게 보낼 때는 매우 조신하고 고결한 사람인척, 딸을 가장 걱정하는 가련한 과부의 모습으로 이야기한다. 가령 "그분의 친절에 마음이 움직였어요." 혹은 "친절한 초대를 거절하면 안되겠지요."라고 하면서 자신이 매우 친절하고 교양있는 여성인 듯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독자는 그녀가 매우 이중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편지의 행간에 담겨진 의미를 읽는 과정은 제인 오스틴 다른 소설을 읽기 위한 훈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수잔 버넌의 과거 행동과 타인의 반응 등을 통해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톺아보면서 읽는 것은 즐거운 과정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첫 편지, 그녀가 시동생 찰스 버넌에게 쓴 편지를 한번 자세히 보도록 하겠다.
편지1
레이디 수잔 버넌이 버넌 씨에게
12월 랭퍼드에서
사랑하는 서방님에게
지난번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하신, 처칠에서 몇 주 함께 보내자는 친절한 초대를 계속 거절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요즘 서방님 부부가 저를 맞이할 수 있는 형편이라면, 오래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동서에게 수일 안에 인사를 했으면 해요. 절친한 친구들은 여기 더 머물라고 다정하게 붙잡지만 그이들이 워낙 친절하고 명랑해서 지금 제 상황이나 마음 상태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교계 행사에 너무 자주 참석하게 되곤 해서요. 그래서 즐거이 은둔 생활을 하는 서방님 댁에 가게 될 날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답니다. 사랑스러운 어린 조카들을 만나고 싶네요. 그 아이들이 저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면 정말 기쁠 거에요. 딸과 헤어질 형편이라 곧 온 힘을 다해 버텨내야 할 때가 올테니까요. 아이 아빠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바람에 엄마로서의 의무도 다하지 못하고 애정 어린 관심도 기울이지 못했는데, 딸을 맡은 가정교사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건 아닌지 많이 걱정이 돼요. 그래서 런던 최고의 사립학교에 딸을 맡기기로 결정했어요. 서방님 댁으로 가는 길에 아일 그 학교에 맡길 생각이랍니다. 처칠에 오지 말라는 말씀만 없다면 댁으로 갈 생각이에요. 그러니 저를 받아들이는 것이 서방님의 권한 밖이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정말 괴로울 거에요.
서방님에게 고마워하는 형수
수전 버넌
시동생 부부가 오랫동안 그녀를 초대하려고 했으니 더이상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매우 친절한 태도를 시작한다. "오래전부커 만나고 싶었던 동서에게 수일 안에 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과연 그녀가 동서를 만나고 싶은 것인지 의심이 생긴다. 편지글을 읽다 보면 동서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동서의 남동생(레지널드)에게 흑심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자신이 사교계 행사에 자주 참석하는 이유도 절친한 친구들이 "친절하고 명랑해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참석하는 것이라도 둘러대지만, 그녀는 실제로 무도회를 즐기고 타인을 유혹하는데 온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열심히 둘러대는 모습에 웃음이 날 지경이다. "아이 아빠가 오랫동안 병상 누워있는 바람에"서 유추해보면 이미 남편은 병으로 죽어 혼자임을 알 수 있다. "딸과 헤어질 형편", "런던 최고의 사립학교에 딸을 맡기기로"라는 말에서 마치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딸과 헤어지게 됨을 말하고는 있으나, 실제로 그녀가 딸 프레데리카를 기숙학교에 보내려는 데에는 더욱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화려한 사교계의 중심에서 남자들을 유혹하고 조종하는 것을 즐기는데 있어서 딸이 짐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젊고 예쁜 딸이 있으면 자신의 나이가 부각될 것이고 남자들의 관심이 자신보다 딸에게 갈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녀의 사생활에 있어서 딸은 자신의 자유를 방해하는 짐이자 훼방꾼일 뿐이다.
왜 수전 버넌은 자신의 딸을 돈은 많지만 멍청한 제임스 마틴 경과 결혼시키려 하는 것일까? 딸이 그렇게 거부하는 데도 말이다. 편지 글을 찬찬히 읽다보면 그녀가 딸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하고 굴복시키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규율이 엄격한 사립학교에 보내는 이유도 딸의 기를 꺾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려는 속셈이다.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 있게 되면 딸은 자연스레 그녀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되니 말이다. 프레데리카는 자신을 "멍청하다", "고집불통이다"고 비난하는 엄마의 언어폭력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딸은 엄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하고자 한다.
이쯤되니, 왜 제인 오스틴이 편지글의 형식을 빌어서 수전 버넌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지 그 윤곽이 보인다. 편지는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전할 수 있다. 수정도 가능하고 때로는 전략적으로 표현 가능하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여 표현할 수 있기에 거짓말도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레이디 수잔 버논 같은 인물에게는 완벽한 조작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수잔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편지를 이용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 요컨대 편지글 형식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 효과를 보여주기에 아주 좋은 장치이다. 결과적으로 전지적 서술자가 아니라 인물들이 직접 말하기 때문에 독자는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독자가 보기에 뻔히 거짓인데도 진실처럼 말하는 인물을 볼 때는 웃음이 난다. 여기서 아이러니와 풍자가 생겨난다. 더불어 편지글은 사회적 관계망, 즉 인물들 간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기에 당시 상류사회 인간관계와 규범, 결혼에 대한 시각, 계급 문제 등도 파악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에게는 일석이조인 셈이다.
그렇다면 신뢰할 수 없는 화자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제인 오스틴 소설의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주로 독자를 노골적으로 속이려고 하는 거짓말쟁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편견, 혹은 이해관계에 함몰되어 현실을 왜곡해서 인식하는 인물을 의미한다. 도덕성의 부재보다는 인식의 한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에마』의 에마 우드하우스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고 주변 사람들을 중매해주려고 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판단이 빗나가고 독자는 그녀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초반의 에마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다가 틀린 해석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독자는 그녀에 대한 신뢰를 거둔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된 것이다. 소설을 읽는동안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을 통해 어느정도 그 특징을 파악한 독자는 이제 전지적 관점에서 에마의 말과 행동의 모순, 오류 등을 발견해 내고, 그 간극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즐기게 된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전략을 제대로 쓴 소설은 바로 『레이디 수잔』이다.
『레이디 수잔』에서 믿을 수 없는 화자를 극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수잔이 딸을 대하는 태도와 남성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때이다. 그녀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와 다른 남성에게 하는 말이 달라서 그 이중성을 찾을 수 있다. 수잔 부인이 친구 존슨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프레데리카를 매우 귀찮고 통제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하지만 레지널드 드 쿠르시처럼 남성 인물에게 편지를 쓸 때는 자신이 딸을 매우 걱정하는 헌신적인 어머니처럼 행동한다. 이 간극에서 생기는 아이러니를 독자만 알아차릴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독자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즐거움도 경험하게 된다.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전략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회적 위선을 폭로하기 좋기 때문이다. 상류사회는 겉으로는 예의와 도덕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계산과 이해 관계가 작동한다. 믿을 수 없는 화자는 이런 이중성을 드러내기 좋은 장치가 된다. 『레이디 수잔』은 제인의 나이 17세에서 18세 사이 1793년 경에 쓰여진 그녀의 초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초기 작품이라 다소 실험적이고 풍자적이고 다소 과감한 내용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실험과 연습을 통해 단련된 훈련이 그 유명한 『오만과 편견』, 『에마』등의 수작을 낳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