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지난 3년 동안 KT&G상상유니브에서 클래스를 운영했다. 2년은 프레젠테이션 스피치를 알려주며 대학생들과 만나고, 지난 1년은 '스피치&스토리' 라는 클래스로 '말을 잘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이다'라는 주제로 학생들과 함께했다. 정작 나의 일도 날 세워하는 것이 버거운 나날들 사이에서 학생들을 만난 건,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였다. 그때 미처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것들. 그때 미처 내가 몰랐던 것들을 이 친구들은 제발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지만
정작 가장 어둡고 치열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시절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지만 정작 스스로는 가장 어둡고 치열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시절. 이제 대학생 신분을 벗어 던지고 사회로 막 나와야 했던 그 시절, 어쩌면 나는 인생에서 가장 묵직한 이야기들을 찾아 헤맸다. 나는 나인데, 나를 증명해야 할 때. 나는 그냥 나인데,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조금 어긋났다고 느낄 때, 스스로 존재의 부정을 하는 순간이 가장 슬펐던 그 힘든 날들을 떠올리며 조금은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학생들을 바라봤다.
학생들을 보면 어김없이 대학생 시절의 나를 만난다. 그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젊은 시절 가장 찬란하고 예뻤을 그 시절, 스스로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바닥으로 치닫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 지금이라도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많이 고생했고, 잘하고 있다."고 꼭 안아주며 하고 싶은 그 이야기일 거고 생각했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그 시절, 나는 어떻게 꿈과 열정 하나로 꿋꿋하게 버텨왔는가 생각해보면,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너덜너덜해진 노트 몇 권이 떠오른다. 그 노트 속 나를 지켜준 수많은 문장, 그리고 장면들. 그 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 속 마지막 장면은 늘 마주하는 순간마다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눈물을 쏟은 뒤 다시 일어서게 하는, 그런 장면이다.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벤자민 버튼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산다. 그는 80세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점점 젊은 청춘으로 늙어간다. 타인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것. 부모에게조차 괴물 취급을 받고 양로원에 버려지는 삶만큼 애처로운 삶이 또 있을까. 하지만 벤자민은 그런 기괴한 운명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자신만의 길을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F.스콧 피츠 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이라는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나는 이 영화 속 주인공인 브래드피트를 보며 늘 F.스콧 피츠 제럴드의 다른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자 늘 나에게 힘을 주었던 '개츠비'의 모습이 있다면 바로 이 영화 속 '벤자민 버튼'일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모습, 사랑하는 이를 향한 순수한 마음, 그리고 끝까지 변치 않고 그 마음을 지켜가는 모습. 심지어 영화 속 여주인공의 이름이 <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이름인 '데이지'와 같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이 영화를 각색한 시나리오 작가가 나와 같은 <위대한 개츠비>의 열렬한 팬일까,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함께 하면서.
어쨌든 벤자민 버튼 역시 개츠비처럼 주어진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데이지와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벤자민의 운명이었다. 벤자민은 늘 그렇듯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자신이 먼저 떠나버린다. 60세의 정신, 하지만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한 벤자민은 전 세계를 여행하며 다시 자신만의 삶을 경험하고 찾아 나선다. 그리고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딸을 위해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 장면은 그 힘든 시절 나를 지켜준 한 장면으로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제 막 사회로 나올 준비를 하며 우리는 아마도 생에서 처음, 진지하게 이 질문과 마주한다. 하지만 누구도 정답을 말해줄 수 없다. 그 답답하고 막막한 삶의 질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무거운 질문을 풀어낼 좋은 단서들을 찾아 헤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타인의 이야기' 즉 영화나 소설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야기’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이유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떠나야만 했던 부모의 절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 벤자민 버튼 특유의 덤덤한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전하는 그 편지는 내가 지금껏 본 영화 중 단연 명장면으로 꼽는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을 캡쳐 해서 핸드폰에 저장한 뒤, 힘들 때마다 늘 꺼내 보곤 했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너무 늦거나, 빠른 경우는 없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꿈을 이루는데 시간 제한은 없으니까.
너는 변할 수도 있고,
그대로 머물 수도 있을 거야.
여기에 규칙 따윈 없어.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도,
최악을 경험할 수도 있지.
나는 네가 최선을 다하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놀라워 할 만한 것들을 보고
전에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해보길 바란다.
너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네가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인생을 살길 바란다.
만약 조금이라도 후회가 생긴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삶은 주어진 그대로 아름답다. 우리가 삶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안에 유희와 쾌락 뿐만 아니라 슬픔과 분노 같은 다양한 감정이 함께 조우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을 대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꼭 추천하고 싶다.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누군가는 인정해줄 거라고, 누군가는 그 노력을 알아 봐줄 거라고,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참 아름답다고, 어깨를 토닥이며 말이다.
채자영
스토리디렉팅그룹 필로스토리 대표
이야기의 힘을 믿는 '스토리 덕후'입니다. 8년 째 기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메시지화하여 전달하는 국문학도 기획자이자, 못생기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쾌락주의자예요.
* 왓챠플레이(WATCHAPLAY) 공식 브런치 코너 '취향공복엔 왓챠 브런치'에 기고한 칼럼의 원문 글입니다. 왓챠플레이팀에서 편집한 글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Aug 07. 2019
글 | 채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