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실수보다 고립을 더 두려워한다
나름의 독서 습관이 있다. 책을 읽을 때 저장하고 싶은 문장은 표시해두었다가, 다 읽은 후 전부 옮겨 적는다. 절대 책을 깨끗이 볼 수는 없는 습관이다. 이래야만 책을 다 읽었다는 느낌이 드니 할 수 없다만.
여러 독서 메모들 중, 이 공간에 어울리는 것들을 틈틈이 담아보려 한다. 첫 번째 책은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의 '침묵의 나선'이다. '사람들은 실수보다 고립을 더 두려워한다'는 표지 글에 혹해 집어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서 읽은지 1년은 된 것 같은데 이제서야 메모하는 나의 게으름 대다나다...)
침묵의 나선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우세하고 다수 의견에 속하면 자신 있게 겉으로 표명하고 소수 의견에 속하면 침묵한다"는 가설이다. 이 책은 여론이 '수많은 개인들의 <두려움 가득한 침묵>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나 역시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도 여러 이유로 침묵할 때가 적지 않으니, 궁금했다.
사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는데, 접은 페이지와 메모를 몇 번 더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고 열심히 일부 옮겨 적었다.
의사소통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면, 퍽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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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운동용 배지를 다는 것, 자동차 범퍼에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스티커를 붙이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의견을 표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침묵을 지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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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현재 변화 중인 이슈들에 대해 빨리빨리 동조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동조를 요구하는 이유는 사회 통합에 필요한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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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세대에 걸쳐 철학자, 법학자, 역사학자, 정치 이론가, 저널리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여론의 분명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지금까지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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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쨌거나 여론이 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정확히 그 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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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대 문명 사회에서 개인은 훨씬 더 공공연하게 사회의 요구에 노출된 채로 서 있다. 개인을 노출시키고, 그로 하여금 자기 주변의 사회적 차원에 계속해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고립에 대한 두려움, 경멸당하거나 평판이 나빠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합의, 즉 <의견의 일치에 대한 필요성>이다. 이것이 개인으로 하여금 주위 분위기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나아가서 대중의 시선public eye을 의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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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나선은 여론이 액체 상태일 동안에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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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견과 행동 방식이 확고하게 세를 구축해서 그것이 관습 혹은 전통이 되면 우리는 그 안에서 더 이상 논란의 요소를 인식하지 못한다. 고립 가능성의 전제 조건이 되는 논란의 요소는 굳건히 자리 잡은 여론, 전통, 도덕 등이 손상된 이후에야, 그러니까 그 확고함이 침해된 이후에야 비로소 개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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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고립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두려움과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이미 확립된 의견과 행동에 <동조해야 한다>는, 익명의 법정의 판결만큼이나 중요한 공공의 요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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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귀족, 통치자들 역시 여론의 지배를 받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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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싹튼 부정적 의견이 아직은 다수 의견에 배치될지 모르지만 만일 그것이 지배적 의견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점차 노예와 자유민,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전체 시민들에게 유효한 것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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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개의 존재로 나뉘는데 하나는 참된 본성, 진정한 욕구, 성향, 관심을 품고 있는 존재이며, 다른 하나는 여론이라는 멍에에 속박되어 형태가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그는 학자를 예로 들어 그 차이를 설명한다.
"우리는 항상 천성에서 나오는 성향과 여론으로부터 생겨나는 성향을 구분해야 한다. 한편에는 오로지 학식 있는 사람으로 존경받고 싶다는 욕망에 기초한 지식에의 열정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가깝거나 멀거나 상관없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자연적인 욕구에서 생겨나는 열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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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조건이 평등할 때 여론은 언제나 각 개인의 마음에 엄청난 무게의 부담감을 준다. 그것은 그를 에워싸고 압박하면서 어디로 갈지 방향을 지시한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법보다는 바로 사회 조직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점점 더 비슷해질수록 개개인은 나머지 전체에 비해 자신을 더욱더 약한 존재로 느낀다.
자신이 그들보다 특별히 우위에 있지 않고 그들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난 점이 없음을 알기에 그런 생각으로 괴로워지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믿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권리조차 의심한다. 얄궃은 것은, 그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거의 인정하게 되는 것은 다수가 그렇다고 주장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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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기경은 시민법은 낙태를 허용하지만 자신은 낙태를 여전히 살인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것은 단지 용어의 대립이 아니다. 두 견해는 양립할 수가 없다. (중략)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까지 포함하는 생명 보호에 대한 기독교적 믿음은 루소가 처음에 시민종교라 일컬었던 세속적이고 시민적인 종교, 기독교의 믿음에 비해 그 굳건함이 조금도 덜하지 않은 감정적 믿음과 대립 관계에 있는데, 그 믿음은 바로 인간해방, 즉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해 결정을 할 권리가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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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세상의 질서를 뒤엎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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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지부조화를 피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세계에 대한 조화로은 이미지가 계속 유지되게 하려고 적극 노력한다. 인지의 복잡성을 줄여야 한다는 필요성에 이어서 선택적 지각은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보도함에 있어 피할 길 없는 또 하나의 왜곡의 근원이 된다.
나는 우리가 어떤 사실들을 어떤 각도로 보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들의 한복판에 자리한 고정관념의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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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대화와 토론이 많아질수록 대중매체의 메시지는 더 널리 퍼지며, 오래지 않아 미디어 수신 지점과 그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지점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미디어의 효과는 대부분 무의식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지각과 대중매체의 눈을 통해 걸러진 지각을 한데 뒤섞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로 만든다. 그러면 그것은, 월터 리프먼이 예견했듯이, 마치 자기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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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좀 더 여론을 잘 이해하게 될수록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대한 이해도 향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