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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ssie Jan 15. 2018

지금 그 느낌이 답이다 - 바스 카스트

직관은 어떻게 우리를 창의적으로 만드는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선택이 너무 어려우면 로직을 그린다. A를 골랐을 때의 장단점과 B를 골랐을 때의 장단점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써보는거다. 그러다보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거라는 기분에. 뭐, 결국은 마음가는대로 하지만.


이렇게 선택결과가 좋으면 ‘운이 좋았다’고 안도하는 동시에 ’내 촉이 꽤 괜찮다’고도 으쓱한다. 이 ‘촉’이라는 건 사람을 볼 때도 작동한다. 뭔지 모르게 쎄한(?) 사람은 일단 조심하는데, 나중에 그 쎄함의 원인을 알게 되는 사건이 대부분 일어나더라. 아무튼 사는데 참 이래저래 중요하다, 촉.


그래서 늘 촉이 좋은,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고 싶은 나는 이 제목의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펼쳐 목차를 보니 더 그랬다.


:생각하려면 느껴야 한다

: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라는 느낌에 대하여


: 더 많은 분석이 더 나은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

: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한 조건

: 지금 그 느낌을 믿을 수 있는가


: 권력의 동기는 나쁜 것인가

: 내가 알아채지 못한 나를 알아보는 법


: 중요한 결정일수록 이성을 믿지 마라

: 스스로 행동하는 인간의 탄생

: 의심하고 질문하는 인간의 시대

: 보는 대로 믿는가, 믿는 대로 보는가


그래서 읽어봤다. 사실 아직도 읽는 중인데, 절반 밖에 안읽었지만 그냥 먼저 메모해놓고 싶어서 읽은 부분만 남겨본다. 더 읽다가 눈에 띄는 부분 있으면 추가해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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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서양 문화권은 우리 안에 있는 두 가지 층위와 힘을 특히 높이 사서 그것을 우리 자아의 정상에 올려놓았다. 이 두 가지란 바로 이성, 그리고 그것이 아끼는 도구인 언어이다.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임마누엘 칸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 역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 즉 ‘비이성적인’ 것들은 제아무리 잘나 봤자 부차적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여담이지만 그 철학자들이 하나같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남자들은 이성을 ㅡ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ㅡ 신격화하면서 여성을 ‘감정’과 예술밖에 모르는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하고 무시하기도 했다.


이런 단편적 시각이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까지 파고들어와 무슨 일이든 언어의 논리와 논리적 논거를 요구한다. 우리의 행동 뒤편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림이나 음악으로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모순된 감정이나 직관이 숨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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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환갑이던 해에 이렇게 말했다. “이제 말은 그만하고 그림으로만 이야기하고 싶다.” (중략) 아인슈타인은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직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직관이다. 직관의 정신은 신성한 선물이며 이성의 정신은 충직한 시종이다. 우리는 시종은 예우하면서 선물은 망각해버린 사회를 만들었다.


(중략) 아인슈타인의 말이 옳다. 창의적 사고는 결코 이성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성은 우리의 새로운 이념과 사상을 점검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념 자체는 우리 안의 비이성적 영역에서, 무의식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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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무의식이라고 해도 사전에 중요한 정보를 먹여주지 않으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이성이 개입한다. 이성은 주택의 위치나 재정 상황 등 주택 시장의 탐문 조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달리 말해 이성은 자신을 전문가로 만드는 데 유익하다. 하지만 결정 그 자체는 ㅡ복잡해질수록ㅡ 의식적 이성으로 내리면 안 된다. 결정이 서서히 무의식에서 떠오르도록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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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아니다. 그런 분야에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스스로를 전문가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일단 전문 지식을 쌓았다면, 특히 복잡한 결정을 내릴 경우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의식적으로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성을 활용하여 정보를 수집하면서 동시에 이성을 차단하여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판단은 무의식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중략) 나는 이런 식으로 한다. 복잡하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결정일 때는 단축의 길을 택한다. (중략)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준전문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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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은 경험 자아의 욕구에 맞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자기가 하는 일에 완전히 푹 빠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한 행복의 감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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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이처럼 두 자아(언어 자아, 경험 자아)가 화합하는 사람들이 두 자아가 불화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과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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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말만 들어도 입맛이 쓰다. 이것 역시 언어 자아가 경험 자아와 거리를 취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는 많은 욕구를 ‘저급하다’ 혹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해당되어도 괜찮지만 나는 해당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통솔하려고 노력한다’와 같은 문항에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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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동기는 ‘인간관계 지능’의 특수한 한 형태로 보는 편이 더 옳다. 권력 동기가 높은 사람은 만인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다. (중략) 권력 동기가 강한 사람들은 제스처를 많이 사용하고 자신의 말을 강조할 때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을 세련되게, 유창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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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중심 기능은 큰 집단의 조직에 있는 것 같다. (중략)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사회적 평판이 중요하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리를 이루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를 통해 부모로부터 배운 규칙의 대부분은 우리를 사회와 융합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시 말해 무리와 사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 언어의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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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추상적 성격은 우리가 사회를 위해,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장기적 합리성을 위해 보상을 연기하도록 도와준다. (중략) 언어 덕분에 우리는 후식이나 원하는 직장 같은 보상을 머나먼 목표라는 추상적 형태로 간직함으로써 지금의 구체적 욕구와 감정을 외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우리가 충동적 감정을 따르지 않고 행동을 조직하거나 계획에 맞춰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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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자아만 과도하게 따르다 보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만성적으로 무시하게 된다. 이것이 지나치면 삶이 완전히 장기적으로 계획하는 합리적 언어 자아에게로 기울게 된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 내면의 욕구와는 다른 추상적 목표를 좇게 된다. 그 경우 우리는 경험 자아와의 연결고리를 잃는다. 이때 두 자아는 흩어진다. 결과는 내적 분열과 자기 소외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후감: 

언어 자아와 경험 자아가 일치하는 행복한 인간이고 싶다. 일하면서 누워있고 싶어하거나 누워있으면서 일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싶다. 그리고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을 때 빠르게 도망칠 수 있고 싶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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