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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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생각에 형태를 입혀 기록하면, 그 형태를 간직한 채 마음 깊숙이 보관할 수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그 생각을 계속적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영감을 주는 것들이 정말 많다고 생각한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대단한 경험이나 위대한 작품일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 당당히 보여주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오랜 시간 계획한 해외여행이 아닌 즉흥 나들이에서도,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 아닌 익명 작가의 짧은 글에서도, 분명 영감을 찾아낼 수 있다.
연구원 직업 특성상 유난히 더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영감은 나를 움직이는 힘이다.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발굴하고, 이에 대해 사색하고, "왜"로 시작하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내가 틀림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정면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것을 증빙한다.
하지만,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아닌 소소한 일상에서 영감을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아주 어릴 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무언가를 발명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은 늘 불편하게 산다." 토마스 에디슨인가 알버트 아인슈타인에 대해 누군가 라디오에서 반은 우스갯소리로 했던 것 같다. 다만, 완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확실히 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것들에서 영감을 찾아내려면 유별난 시선이 필요하다. 요새는 글을 읽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재미있어 남의 글을 자주 읽진 않지만, 확실히 나보다 훨씬 영감을 잘 포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주변에서 영감을 찾아내기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여유라고 생각한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누구는 어느 한 구절에서 영감을 찾는 반면, 누구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굳이 사람으로 구분할 필요도 없다. 동일 인물이라도, 이전에는 흘려보냈던 구절이 갑자기 눈이 꽂히는 경우도 있다.
차이는 여유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생각을 더 다양한 각도로 전개하여 눈앞의 상황이나 글, 음성 등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칫 지나칠 수 있는 구절을 포착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음의 여유만으로 주위에 숨어있는 모든 영감의 요소들을 발굴할 수는 없다.
아무리 여유를 가지고 같은 경험, 같은 작품을 몇 번 곱씹어본다고 해도 쟁취하지 못하는 영감이 있다.
왜냐면 결국 영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목격한 어떤 상황이나 마주친 어떤 문장에 공감이 가능해야 그것을 놓치지 않고 생각에 기입한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생각을 뻗어나간다.
공감이라는 것은 여태 내가 쌓아온 경험, 생각의 크기와 질에 비례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책, 같은 영화라도, 인생에서 접하는 시기에 따라 느끼는 점이 다르다. 누구에겐 인생 영화도 누구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다시 보니 마음을 울릴 때도 있다. 최근에 나에겐 노자와 히사시의 소설, <연애시대>가 그랬다.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는 리이치로와 하루의 실감 나는 독백과 끊임없는 사랑싸움에 마냥 즐겁게 읽었는데, 얼마 전에 다시 볼 때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결혼"에 대한 태도와 생각에 더 이입하여 읽었다. 분명 그것은 곧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의 나이가 작용한 것이리라.
이 때문에 이전에 인상 깊게 느낀 작품은 (혹은 그저 그렇게 생각한 작품까지도) 꼭 몇 년 후에 다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굴한 영감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의 곡선" 이론에 따르면, 사람의 기억은 지수적 감쇠(exponential decay) 추세를 보여, 불과 일주일이면 기억의 80% 이상을 잊어버린다고 한다.
에빙하우스에 의하면, 이 망각의 곡선을 거스르는 방법이 반복 학습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 외에 기록하는 것 역시 망각의 곡선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머릿속이 늘 복잡하고, 수많은 생각을 동시에 처리하며 살아간다. 당장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 것인지 같은 간단한 고민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일주일, 한 달 내에 무슨 일정이 잡혀있는지, 심지어는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 등의 철학적 고찰도 마음 한편에 간직한 채 하루를 난다. 때문에 우리의 두뇌는 당장 중요한 생각을 처리하기 위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생각을 머리 바깥으로 밀어낸다. 물론, 때때로 고맙게도 이 덕분에 불필요하거나 잊고 싶은 기억을 삭제할 수 있지만, 역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생각 역시 무차별적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생각에 형태를 입혀 기록하면, 그 형태를 간직한 채 마음 깊숙이 보관할 수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그 생각을 계속적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형태를 갖춘 상태로 저장했기 때문에 큰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고차원의 생각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여러 곳에서 영감을 발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감을 기록하면 오래도록 꺼내 볼 수 있는 형태로 마음속에 보관할 수 있다.
형태를 갖춘 영감을 디딤돌 삼아 하나둘씩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언젠가 멋진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인생의 고원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