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아닌 인격을 입는다

사람이니까요

by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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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남들은 그러지 않는데도, 굳이 격식을 차리는 사람에게는 분명 어딘가 특별함이 느껴진다.






얼마 전, 문득 <인턴>이라는 영화가 떠올라서 단숨에 시청했다.

영화의 주인공, 벤 휘테커(Ben Whittaker 역, 로버트 드 니로)는 만 70세의 은퇴자로, 전화부를 인쇄하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베테랑이다.

은퇴 후, 아내와 사별하고, 끊임없는 도전과 새로운 시도에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던 그는, 30세의 젊은 여성 CEO, 줄스 오스틴(Jules Austin 역, 해서웨이 역)이 운영하는 패션 스타트업, "About the Fit"의 시니어 인턴 모집 공고를 만나게 된다.

고민 끝에 홧김에 지원서를 넣은 그는 결국 회사에 합류하여 CEO 줄스의 개인 보조로 임명되는데, 정작 시니어 인턴 프로젝트를 기억하지 못하는 줄스는 몇 날 며칠을 벤에게 아무 일감도 쥐어주지 않는다.


좌절하기 쉬운 상황에서, 벤은 정반대를 선택한다.

매일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일찌감치 출근하여, 시키지 않아도 필요한 업무를 알아서 파악하고, 부탁하지 않아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길을 내민다.

파릇파릇한 20대 직원으로 둘러싸인 스타트업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던 벤은, 급속도로 사무실 내 최고 인기인으로 부상하며, 결국에는 CEO 줄스의 신임까지 쟁취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벤에 대해 긴 시간 사색을 했다.

그 결과, 벤이 들인 여러 노력 중 첫째가 바로 '옷 차려입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부모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아버지의 회사생활에 대한 첫 기억이 "차장 승진"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안에 아버지의 출근 복장은 늘 '풀(full)' 정장이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대인 업무를 보셔서 더더욱 그랬을 수 있지만, 이따금 아버지 시대의 직장생활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직장, 심지어 꽤 육체적인 업무를 요하는 직종 역시 대체로 정장 차림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대략 40년, 현재 직장의 모습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고객을 상대하는 업무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사무직도 더 이상 정장을 차려입지는 않는다. 소위 "비즈니스 캐주얼", 니트 또는 블라우스에 슬랙스, 깔끔한 스니커즈 정도면 충분히 격식을 차리는 격이다.

연구원의 경우, 대인 업무가 거의 부재하기 때문에 복장의 자유도가 매우 높다. 회사 사무실의 사람들을 보면 이게 회사인지 대학원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와이드 진 또는 조거 팬츠에 오버핏 티셔츠. 그나마 잘 차려입고 다니는 사람 정도가 청바지에 니트나 얇은 셔츠+플란넬 정도이다. 낮 시간에는 여기저기 회의에 불려 다니기 바쁜 부서장님도 평범한 티셔츠에 치노 팬츠 정도이다.


나도 주변 동료들의 모습에 점점 익숙해지다 보니, 입사 9개월부터는 청바지에 티셔츠 정도로 입고 다녔었다.

하지만, <인턴>을 오랜만에 보고서, 옷차림이 줄 수 있는 인상과 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남들은 그러지 않는데도, 굳이 격식을 차리는 사람에게는 분명 어딘가 특별함이 느껴진다.

좋은 느낌의 특별함이다. 모두가 보편적으로 편안한 차림을 하고 다닌다지만, 그래도 회사는 회사이다. 보수를 받고 그만큼의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 오는 곳이다. 혼자 옷을 차려입는다고 해서 TPO에 맞추지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차려입는다"라고 표현해도, 니트에 슬랙스, 바짝 당긴 벨트와 로퍼 정도이지만, 옷을 차려입음의 위력을 자못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점은, 남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행동과 인격조차 바뀐다는 것이다.


옷에 신경을 쓰고부터 동료와 상사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생각보다 빠르게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솔직히 나는 이 부분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내 '편한'차림을 실컷 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무슨 이상한 바람이 들어 갑자기 얘가 옷을 이렇게 입고 다니지? 연구소에 누구 관심 있는 사람이 생겼나?' 정도로만 치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들의 반응은 이전과 확실히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를 금방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상사에게 그 변화를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무슨 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얘가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분위기를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를 포함한 모든 동료들이 더 내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더 내 말에 신뢰를 가지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논의를 통해 업무 진척을 이뤄내는 연구직에 이런 요소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했듯, 이보다 더 놀라운 점은 바로 나 자신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옷을 차려입음으로써 서있을 때와 앉아있을 때 허리를 펴기 시작했으며, 걸음걸이에 여유가 생겼다.

그뿐이랴, 자신감도 많이 올라갔다. 평소였으면 조용히 지나갔을 텐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주저함이 줄었다. 일상적인 코멘트나 자연스러운 관심에 대해서도 부끄럼이 꽤 사라졌다.

또, 전반적인 생활에 여유가 늘었다. 운전을 할 때에도, 업무를 볼 때에도, 조급함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마지막으로,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자신의 말의 무게를 체감한다. 상대방이 나를 더 진중하게 대함에 따라, 내 말 한마디가 끼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침묵을 어색해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만족스러운 변화이다.

말을 줄이고 더 참을성 있게 듣기 시작했다. 영화 <인턴>의 벤에 대해 모두가 입모아 칭찬하는 점이, 주변 동료들에 비해 2배 이상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스킬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사람은 경험이 많고, 지식이 많을수록 더 많이 쏟아내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렇기에 나이를 먹을수록 귀 기울여 듣는 스킬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옷을 바꿈으로써 그 스킬을 연마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옷차림도, 분위기도, 환경도 더 편한 것을 본능적으로 갈망한다.

하지만,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득이 많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슬랙스와 니트가 청바지와 티셔츠에 비해 생각보다 불편하지도 않으니, 옷차림에 조금만 더 신경 써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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