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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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감정적이고, 사회적이며, 욕심이 가득하다.
바로 며칠 전 일이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이지만, 연차로는 6개월 입사선배와 사내 메신저로 나눈 이야기다.
나: "사람이 일에 감정적이면 안 되는 데 참 쉽지 않네요."
상대: "사람이니까요. / 쉽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 연차 쌓이면 좀 나아지겠죠."
발단은 이렇다.
내가 속한 회사의 연구소는 '과제' 단위로 움직인다. 단일팀에서 여러 과제를 진행하고, 과제 내에서도 세세한 분업이 이루어진다.
공교롭게도 내가 속한 과제는 연구소 전(全) 부서 중에 단일 과제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인원이 많은 과제이다. 개발 막바지에 들어선 차기 야심작 다음으로 선보일 차차기 제품을 개발 중이기 때문이다.
규모가 크고 인원이 많은 만큼 과제의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르지만, 동시에 상호 연구원 간 실시간 소통이 어렵다는 맹점이 있다. 그리고 이는, 체계적인 분업으로 이루어지는 개발에는 치명적이다.
우리가 개발하는 제품에는 정말 다양한 부품이 들어간다.
현재 우리 과제는 이 다양한 부품을 세 군으로 나눠, 세 부서에서 개별적으로 개발 중이다. 그러나 당연히 제품 평가를 진행할 때에는 모든 부품을 포함하여 조립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동 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의 분업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만약 최종 제품에 A, B, C, D, E, F의 부품이 들어가고, 그중 내 부서에서는 A, B를 개발 중이라면, 다른 C, D, E, F는 각 1종으로 고정하여 테스트하고, 어느 정도 A, B의 윤곽이 잡혔을 때, 옆 부서에서 더 향상된 C, D, E, F를 받아 조합 평가를 진행한다.
말한 것처럼 철저한 분업이 이루어지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보고라는 것도, 회의라는 것도 존재한다. 그리고, 윗선이 포함되는 경우, 그 일정을 바꾸기 쉽지 않다.
과제 리더는 차기 보고, 회의가 도래하였을 때, 무엇이든 발전을, 진보를, 개선을 선보여야 한다. 주기는 대략 2주에서 한 달 정도. 그 안에 확실한 변화를 일궈내기엔 턱 없이 부족하지만, 리더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 실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부득이하게 옆 부서에서 개발 중인 부품을 받아 테스트에 사용하기도 한다. 사실, 개발 중인 부품을 받을 수 있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보통은 그 부품을 우리 부서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기계가 하는 일을 사람이 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편차, 불균일이 생긴다. 연구 개발에서 그 불균일을 상쇄하는 것이 바로 노하우이다. 제품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에 대한 해박한 전문 지식과 폭넓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특정 부품을 집중 개발하는 이의 스킬과 노하우를 따라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 부서 개발품을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옆 부서도 자신의 일이 있기 때문에, 한 번 전체 공정을 가르쳐주는 것 이외에는 우리를 돕기 힘들다. 그러면 우리는 옆 부서가 몇 주, 혹은 몇 달간 고생하며 쌓은 노하우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하우를 쌓아서 그 부품을 지속적을 쓸 수 있으면 다행이다. 보통은, 우리가 노하우를 쌓았을 때쯤, 개선품이 나온다. 그러면 우리의 노하우와 그동안 진행했던 실험은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다 보니, 참을성도, 이해심도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다.
2주에 한 번씩 과제 리더를 포함한 모든 과제원들에게 보내는 업무 요약/업데이트 이메일에 점점 날이 서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용뿐만 아니라, 길이, 문체에도 신경을 기울였던 몇 달 전과 다르게, 2주 간 진행한 모든 내용을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부서 특성상, 과제 내 다른 부서보다 개인이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분석 업무가 많은데, 읽을 테면 읽어보라는 식으로 매번 논문 한 편 길이의 이메일을 던진다. '나는 매일매일을 이렇게 구르고 있는데 어차피 표준 부품이 바뀌면 모두 소용없겠지. 그래도 봐라, 내가 얼마나 많은 양의 일을 소화하고 있는지.' 뭐 이런 심산이다.
최근에 위의 경우가 또 한 번 발생했다. 옆 부서 개발품 제작을 열심히 손에 익혀 놨더니, 표준 부품이 바뀐 것이다.
날을 바짝 세워 업무 요약 이메일을 송부했다. 본 이메일에 기재한 모든 실험 결과에 대한 세부 사항과 조건을 포함하여. 이 "실험 조건" 부분만 몇 줄을 잡아먹었다.
그걸 보더니 글 도입에 언급했던 입사 선배가 넌지시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같은 부서 내, 같은 일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질문할 내용은 없었을 텐데. 열어보니 정리를 잘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본인도 그 업무에 대해 요약 이메일을 송부하려 하는데, 내 이메일을 참조로 달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더니, 본인도 느꼈다고 한다. 내 이메일 속 분노를. 그 이야기를 하고 서로 한참을 웃었다.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감정적이고, 사회적이며, 욕심이 가득하다.
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인지하면 화를 참을 수 없고, 과제 성공이라는 대의를 위해 힘쓰면서도, 개인의 업적을 최대한 부각해 모두가 알아줬으면 한다. 특히 리더는 더더욱.
별 수 있겠나? 우린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