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니까요
추석 연휴의 시작과 함께 해외여행을 나서며 책을 한 권 챙겼다. 여행 중에도 틈틈이 여유를 가지며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싶었으며, 무엇보다 오며 가며 기나긴 비행을 견디기 위해서였다.
가방에 넣은 책은 어릴 적 인상 깊게 읽었던 <Tuesdays with Morrie>,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다.
이 소설은 작가 Mitch Albom과 그의 스승 Morrie Schwartz를 바탕으로 한 실화를 그린다. Morrie는 미국 Brandeis University의 사회학교수였으며, 주인공이자 작가인 Mitch는 1979년 해당 대학에서 졸업한 Morrie의 애제자였다. 졸업 후 15년 동안 Mitch는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하며 스승 Morrie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잊어갔는데, 우연히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기로 한다. 기나긴 공백이 무색하도록 Mitch를 친근하게 맞아준 Morrie는 루게릭 병(ALS)에 걸려 이미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였고, 그 후 둘의 만남이 지속될수록 그의 상태는 더 심각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orrie는 그의 제자 Mitch에게 숨이 멎는 순간까지 12주 동안 인생에 대한 마지막 특강을 선사한다.
십 대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를 되돌아보면, '당시에는 Morrie의 지혜롭고 철학적인 조언의 극히 일부분만 이해했을 텐데도 용케 감명받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스포츠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주인공 Mitch를 에워싼 언론사 파업과 전 세계를 뒤흔든 O.J. Simpson 재판 등 시대적 배경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금에서 Morrie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더 큰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 같다. 물론, 현재 나의 인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만큼, 역으로 매우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발언도 많다. 자기 계발서의 매력을 뚝 떨어뜨리는 그런 문장들 말이다.
하지만 Morrie의 여러 천금 같은 조언 중 유독 와닿은 것이 있는데, 바로 죽음에 대한 다음 발언이다.
"Once you learn how to die, you learn how to live.
(죽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사는 법을 알 수 있는 거야.)"
실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자만이 뱉을 수 있는 말이다.
Morrie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Everyone knows they're going to die, but nobody believes it. (모두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아.)" 다시 말해, 모두가 언젠가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막상 아무도 죽음이 닥칠 때까지는 실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고, 실제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 아쉬운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Morrie는 항상 죽음에 대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만약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떡할 것인가?' 이는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는 상상이다. Morrie는 이 질문의 불교 버전을 언급한다. '불교승들은 매일 어깨에 앉은 상상 속의 새에게 질문하곤 하지.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준비를 마쳤는가?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모두 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진심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쫒고 있는가?' 이처럼 '오늘의 진정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평온하고 만족스럽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늘 마음 한편에 두고, 주기적으로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는 연습을 함으로써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물론 Morrie 역시 10년 전인 60대 시절만 해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물질적인 부분에 몰두'하며, '마치 반쯤 잠든 것처럼, 우리가 의무로 여기는 일들을 그저 수동적으로 이행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우리는 물질적인 부분 외의 것들, 예컨대 우리를 향한 사랑이나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당연시하며, 이에 대해 충분한 감사를 표하고 있지 않다고 질책한다.
이에 반해, 죽음을 목전에 둔 자신은 이 모든 것을 충분히 흡수하고 감상할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그가 강조한 부분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이다. 두 다리가 묶였음에도, 창 밖을 바라보며, 나무의 변화를 관찰하고, 사람들 옷차림의 변화를 관찰하며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카지노와 대형마트가 대부분 지하에 위치하고, 백화점에 창문이 없는 이유가 바로 손님들이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시간에 무감각해지면, 본래 예정보다 더 긴 시간을 한 장소에 머무르고, 특히 카지노, 대형마트, 백화점 같은 시설에서는 머무르는 시간이 길수록 돈을 많이 쓰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도 비슷하다.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면,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을 한 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고립, 은둔이 장기화되기 쉬운 이유 또한 외출이 줄어들수록 시간에 무뎌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관계나 사회진출로의 실패는 자신을 계속 실내로 감금한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바깥세상과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 심적으로 편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에 무뎌지면, 자신이 한 장소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결국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시간에 무뎌지면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한다.
어찌 보면 "죽음에 대비"하는 자세란,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시간을 아깝게 흘려보내지 않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장기적인 칩거생활로 시간에 무감각해진 사람이 오랜만에 외출하여 계절의 변화를 인지하고, 온도 차이를 피부로 느끼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한다. 나도 그래서 계절의 변화를 지각할 수 있는 증거를 좋아하고, 자주 느끼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들판이나 논의 색 변화라던가, 나뭇잎과 산의 무성함의 변화 같은 것들 말이다.
"죽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사는 법을 알 수 있는 거야." 이 말에서 '죽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곧 만족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방법을 익힌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의 첫 번째 단계는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시간을 아끼는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고,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증거를 주변에서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유익한 활동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