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니까요
며칠 전에 영화 <세계의 주인>을 관람했다.
이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한 뉴스 기사를 통해서였는데, 영화제에서 본 영화를 먼저 접한 감독, 배우, 기타 업계 관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꽤나 후한 평을 주었던 게 구미를 당겼다. 게다가 원래 국내외 저예산 독립영화에 대해 관심이 있었을뿐더러, 최근 <어쩔 수가 없다>를 포함한 호화로운 캐스트와 유명 감독을 수반한 메인스트림 영화들이 큰 흥행을 타지 못하면서 자연스레 다른 쪽으로 관심이 흘러갔던 것 같다.
전문 영화 평론가는 아니지만 간단히 감상을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매우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계에 대한 짧은 지식으로는 배우 장혜진 분을 제외하고는 다소 생소한 출연진이었는데, 모든 분들의 연기가 생동감 있고, 돋보였다. 무엇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고, 메타포가 직관적이라 좋았다. 윤가은 감독님이 긴 시간을 들여 고민 끝에 제작한 영화인 만큼,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캐릭터성을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스포일러 주의>
대부분의 뉴스 기사와 영상들은 본 영화를 단순히 '사랑과 우정, 이성과 성(性)이 최고 관심사인 여고생 이주인(배우 서수빈 분)의 좌충우돌 성장기'로 치부한다. 물론 주인공 '주인'의 과거가 플롯을 이루는 주요 요소이고,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야 서서히 밝혀지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자제하기 위해서 보도에 담기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개인적으로는 기사만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던 터라 심오한 내막에 약간 놀라긴 했다.
'주인'은 쾌활하고 유쾌한 성격이며, 공부를 잘하는 동시에, 운동 신경도 우수하고 활동적이라 학교에서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이다. 그러나 집안을 들여다보면, 아버지가 부재하고, 어머니는 장시간 일하는 데다, 알코올 의존증까지 있어, 사실상 '주인'이 가장 노릇을 하며 어머니와 초등학생 남동생까지 직접 돌봐야 하는 상황이다. 안 그래도 십 대 후반인데, 집안에서 풍족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주인'은 더욱 또래 남자아이의 사랑을 갈망하는데, 연애를 시작하는 족족 길게 이어가지 못하고 빠르게 헤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본인은 그저 '상대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서'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애정행각, 특히 신체접촉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관객은 금방 깨닫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꽤 초반부에 등장한다. '주인'의 반친구 '수호'는 초등학생 성폭행 범죄자가 출소하여 동네로 이사를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교생 서명운동을 벌인다. 직접 작성한 성명문과 서명지를 이리저리 들고 다니며 교내 모든 학생의 서명을 받는 데 성공하는데, 왜인지 '주인'은 끝까지 서명에 반대한다. 결국 둘의 마찰은 몸싸움으로 번지고, 교장과 담임을 동반한 대면에서 '주인'은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데.
알고 보니 '주인'은 어릴 적 긴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처음에는 관객에게도 괜한 핑계로 들렸겠지만, '주인'이 '수호'의 서명운동에 반대한 이유는 '수호'가 작성한 성명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관례적이고 익숙한 문장이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초등학생처럼 어린 시절에 당한 성폭행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피해자는 영원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라는 말이었다. '주인'은 이 대목은 명백히 틀렸으며,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는데. 영화를 보며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주인'의 아픈 과거가 밝혀지자, 그럴 수 있겠다고 수긍하게 되었다.
실제 성폭행 피해자인 '주인'에게 그 문장은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에 자신을 속박시키고, 자신의 상태를 제멋대로 단정 짓는 또 하나의 상처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를 위하고 동정하는 말이 오히려 당사자에게는 또 다른 상처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는 영화를 통틀어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부분이었다. 상대를 위한다고 뱉은 말이 도리어 그 사람한테는 공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영화는 아주 절묘한 예시를 통해 전달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를 비롯한 사상자를 수반한 안타까운 사고들이 발생할 때마다 몇몇 정치인들이 그 사건을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삼는 것을 보고 혀를 차곤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혹시 나 자신은 무심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발언을 하지는 않았을지 돌아보게 되었다. 설령 그것이 그들을 위하고, 생각하는 말이라 해도, 그들 자신이 받아들이기에 상처라면, 그것은 분명 좋지 못한 발언일 것이다.
이는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주 메시지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주인'이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소문이 퍼지자, 친구들은 '주인'을 더 멀리 대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장난도 트라우마로 인한 히스테리로 해석하기 시작했고, 괜히 말조심을 한답시고 대화를 자제하기도 했다. '주인'의 친한 친구는 그때까지 자신에게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로 인해 '주인'은 영화 내내 익명의 학생에게 그녀를 나무라는 쪽지를 받게 되는데.
영화의 클로징 씬에서 그녀가 받은 마지막 쪽지에는 진심 어린 사과가 적혀있었다. 그동안 그녀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는 말과, 사실은 자신도 똑같은 피해자라는 고백, 그리고 자신과 다르게 떳떳이 아픈 과거를 밝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줘서 고맙다는 감사가 담겨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경험을 겪었고, 어떤 아픔을 딛고 일어섰는지 결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설령 가까운 친구나 연인이 자세하게 그 과거를 설명해도 그 사람이 느꼈던 감정들을 똑같이 경험할 수는 없으며, 비슷한 아픔을 겪게 되더라도 절대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껍데기뿐인 위로는 상대방에게 상처일 수 있다. 겪어보지 않은 일을 겪어본 것처럼,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치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무례한 행동이다. 어떤 아픔이고 어떤 시련이든 살아있다는 건 이겨냈다는 증거이다. 견뎌냈다는 방증이다. 그러니 이해할 수 없는 남의 과거를 빌미로 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고 단정 짓는 일은 절대 하면 안 될 것이다.
'내 인생 아직 안 끝났다고. 네가 뭔데? 네가 뭘 알아?"
- 작 중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