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결심하게 된 이유

사무실만 가면 불안합니다.

by 일생

1. 강박증과 정신병적 증세

나는 상급기관 전입 후 사업소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본청으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본청으로 오니 사람이 많고 딱딱한 분위기에 위축되어 사람 관계에 대한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계속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었고 다음과 같은 증상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 행동이 분위기를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실수했던 언행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자책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욕설이 나오기도 한다.
자책이 반복되니 위축되어 대화를 할 때 긴장하여 말실수로 이어진다.
말실수가 계속되니 말수가 줄어들고 점점 사람의 눈을 못 마주치게 되며,
동료가 대화를 요청하더라도 단답형의 대답만 하여 대화를 오래 이어가지 못한다.
사무실에서 나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구분하게 되고 출근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 되고 온갖 이유를 대어 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이런 문제로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고 전 근무지에서는 직원들과의 관계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 증상을 극복하려고 퇴근 후 아내에게 그날 있었던 일과 내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아내는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갈 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주문을 외웠다. “편하게 하자.”


처음에는 긴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짝다리를 짚기도 하고 어깨를 벽에 기대어 대화를 했다. 이 방법들이 효과가 있었는지 일시적으로 좋아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도 잠시 아내에게 사소한 것까지 내 행동의 잘못 여부를 병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아내의 대답을 듣지 못할 때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결국에는 강박증과 불안장애 진단을 받고 질병휴직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나날이 심해지는 정신병적 증세는 내가 퇴직을 결심하게 된 첫 번째 이유이다.



2. 비효율적인 업무방식

공무원의 업무는 법령에 절차와 방법이 규정되어 있으며, 상급자에게 구두(口頭) 보고는 허락되지 않는다. 상급자에게 보고할 경우 반드시 뭐라도 적힌 보고서가 있어야 하고, 높은 직위로 올라갈수록 그 보고서의 중요성은 커진다. 보고서는 업무 담당자가 작성하고 중간 관리자의 검토를 거쳐 최종 결재권자에게 보고된다.


나는 8년간의 공직 생활 중 내 보고서가 한 번의 수정도 없이 결재된 적이 거의 없다. 물론 내 역량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행정을 수십 년간 해온 관리자에게는 내 보고서가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지적받았던 대부분은 한 글자, 글자 크기, 자간 미세조정 등 내용 전달에 전혀 문제가 없는 지엽적인 부분들이었다. 한 글자로 몇 번을 수정한 적도 많다. 게다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내용도 많았고 보고하더라도 몇 마디의 말이면 충분할 것을 관리자들은 관행적으로 보고서를 요구했다.


보고서를 요구하니 보고서를 작성한다. 관리자는 결재권자에게 단 하나라도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내 보고서에 수정을 거듭한다. 깔끔했던 보고서는 누더기가 되고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는 퇴색된다. 드디어 수정이 완료된 보고서가 올라가면 결재권자는 그 보고서를 몇 분 만에 결재한다. 이 과정에서 수정을 거친 보고서가 내 첫 보고서보다 못하다고 느낀 경우가 많았고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작성하더라도 수정은 항상 존재해 왔기에 "관리자들은 부하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수정하면서 자신이 일을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러한 비효율적인 프로세스가 너무나도 싫다. 공무원의 업무에서는 빠른 결과를 얻고 싶어도 생략할 수 없는 형식적인 절차가 너무나도 많다. 음주운전, 성비위, 뇌물수수 등 몇 가지만 피하면 잘리지 않는다는 생각, 능력주의가 배제되는 호봉제는 변화를 더디게 만든다. 이 속에서는 유연한 사고를 갖기 어려우며, 나도 모르게 점점 젖어들어 규칙 주의자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3. 상급자 중심의 조직체계

에피소드 1. 주요업무보고
의회 주요업무보고가 있을 때면 각 부서에서는 한참 전부터 ① 주요업무보고서, ② 주요업무보고서의 보조자료, ③ 예상질의응답서, ④ 백데이터(각종 수치의 근거자료)를 작성한다. 사실 공식적인 자료는 ① 주요업무보고서 딱 하나인데 보고자(부서장)의 편의를 위해서 ②, ③, ④를 작성한다. 작성 자료는 한 건당 최소 수십 페이지를 넘긴다. 작성 후에는 보고자가 보고 석상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주요 내용을 미리 설명드린다. 보고가 시작되면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실시간 원격 방송으로 지켜보다가 지적사항이 나오면 즉시 대응자료를 작성한다. 주요업무보고가 큰 문제없이 잘 끝나면 다행이고 지적사항이 많이 나오면 그날은 조심해야 한다. 자칫 실수하면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는다.

에피소드 2. 점심시간
일주일에 한 번은 점심시간에 국장님과 과장님을 모신다. 10시 반쯤 되면 국장님께 다른 점심 약속은 없으신지, 어떤 것을 드시고 싶은지 여쭤보고 메뉴를 정한다. 다음으로 과장님, 팀장님, 팀원들의 참석 여부를 확인한다. 인원이 확정되면 식당에 예약을 한다.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경우가 많아 여기까지 30분은 족히 걸린다. 출발시간보다 10분 일찍 나와 내 차를 정문에 대기시켰다가 모두 탑승하면 식당까지 운전한다. 식당에서는 수저, 물, 물수건, 냅킨, 셀프 메뉴 등을 준비한다. 식사를 마치면 내 차로 모두 청사 정문에 내려준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장님과 과장님의 식사비는 팀원들이 사비로 걷어서 냈다.

에피소드 3. 회식
회식자리에서 사회자가 식순을 마치면 직원들은 슬슬 걱정에 빠지기 시작한다. 언제 과장님 옆에서 술을 따라드리며 얼굴도장을 찍을 것인가? 장담컨대 모든 공무원들이 회식자리에서 갖는 걱정이다. 과장님 옆자리는 경쟁이 치열하다. 비지 않는 술잔처럼 한 명이 치고 빠지면 다른 한 명이 금세 자리를 채운다. 물론 나도 한다. 다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불안하다. 과장님은 부하직원들이 술 한 잔 따르기 위해 부담감을 가지고 온다는 것을 아실까? 아마 아시겠지. 과장님도 부하직원이었을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부디 과장님의 기억력이 좋길 바란다. 술 취한 과장님의 잠깐의 기억을 위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고생을 하니 말이다.


위 에피소드들은 공무원 조직에서 '상급자 중심의 조직체계'를 보여주는 몇 가지 단편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사실 상급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조직체계가 문제이다. 공무원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상급자의 의견은 절대적이며, 그 권력의 근원인 인사권은 몇 안 되는 상급자만이 가지고 있다. 공무원 인사제도가 계급제로 유지되는 한 상급자 중심의 공직문화는 바뀌기 힘들 것이다.



4. 평균 이하의 처우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옆 부서에는 일을 너무 잘해서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고 다른 사람의 업무까지 도맡아 야근을 밥 먹듯이 하였으며, 대인관계도 좋아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인사철만 되면 다른 부서에서는 그 선배를 데려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느 날 선배는 내가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한 것을 알고는 상담을 청해왔다. 요즘 아파트 가격이 많이 오르는데 아직 내 집 마련을 못해 불안하니 아파트를 매수할 예정이며, 저축해 둔 돈이 없어 주택담보대출, 행정공제회 불입금, 공무원 연금대출 등을 모두 끌어서 사용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배는 그 아파트를 매수하는 것으로 마음이 굳어진 상태라 별말 없이 몇 가지 사소한 부분만을 조언해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주하였다. 그 후 다시 생각해 보니 무언가 안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존경하고 열심히 일하는 분인데 20년간 피땀 흘려 일한 대가가 아파트 한 채도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이제 남은 것은 연금밖에 없는데, 공무원 연금도 국민연금과 통합되거나 수령액이 크게 감소할 것이다. 이 사례를 겪고 나니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부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졌다.


공무원 조직에서는 사익에 관한 내용을 입에 담는 것이 금기시되며, 유일한 장점(이자 단점)인 ‘정년보장’과 (곧 수령액이 크게 감소할) ‘공무원 연금’은 최소한의 생활 유지를 가능케 하여 공무원들이 경제에 관심을 갖기 어렵게 만든다. 아마 공무원들의 경제 지식수준은 민간기업이나 사업자에 비해 현저히 낮을 것이다. 퇴근시간 후 사무실만 봐도 그렇다. 팀장님 정도의 연배가 되신 분들은 야근을 많이 하신다. 보통 아이가 대학에 다니고 있을 텐데 봉급만으로는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시스템이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한 것인가? 나는 하나의 직업에 평생을 바친 물질적 대가가 대출을 다 갚지 못한 아파트 한 채와 죽기 직전에 받는 국민연금뿐이라면 섭섭할 것 같다.



5. 시간의 레버리지

내가 퇴직을 결심하게 된 마지막 이유는 '시간의 레버리지'를 빨리 써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레버리지 / Leverage

적은 힘으로 큰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지레의 원리를 투자와 운영에 접목시켜 더 높은 효율을 추구하는 행위를 뜻하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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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에서 레버리지는 흔히 대출, 전세금 등으로 활용되는데 레버리지를 사용할수록 전체 투자금에서 자기 자본이 줄어들어 수익률이 높아진다. 나는 현재 물질적으로는 감당 가능한 선까지 모든 레버리지를 끌어 써서 자산의 시가총액을 크게 늘려놓은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게 남은 레버리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으며, 퇴직 후 일정 시간을 레버리지로 나에게 투자하여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1만 시간은 매일 3시간씩 10년인데, 만약 하루 10시간씩 훈련한다면 3년밖에 걸리지 않는다. 나아가 하루에 12시간씩 좋아하는 일에 몰입한다면 2년 만에 전문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좋아하는 일에 대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 시간의 레버리지를 쓴다면 단기간에 미친듯한 성장을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가치는 비례해서 떨어지고 더불어 신체적인 능력도 퇴화하니 내 능력, 경험, 체력의 균형이 정점에 달해있는 지금이야말로 레버리지를 써야 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또한 나이가 40세를 넘기면 실질적으로 퇴직이라는 모험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내는데 퇴근 후 2시간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레버리지의 효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복리로 나타나기에 한시라도 빨리 레버리지를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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