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제 길을 찾아 떠나겠지
몇 달 전부터 아들 녀석이 운동을 하겠다고 나섰다 (비밀인데 살 뺀다고). 그렇게 닦달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더니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운동을 하겠다고 한다. 코로나 시대에 어디 가서 운동을 하기는 어렵고 그냥 집 앞에서 걷겠다고 한다. 그 길은 기껏해야 200미터밖에 되지 않는 짧은 코스지만 그래도 가로등도 있는 아스팔트 도로다. 집 앞 언덕을 오르내려도 되지만 그 길은 풀도 많고 밤이면 불빛도 없다. 더구나 그 길에는 이따금 뱀도 보인다.
"잘 생각했다!" "와, 대단한데!" 아내와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운동하겠다는 아들을 부추겨 주었다. 물론 속으로는 '며칠 하다가 그만두겠지'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가 어디 한 두 번인가? 그렇게 며칠 운동을 하고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그만두겠지 싶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한 달이 넘도록 계속 운동을 하고 있었다. '어라? 이번에는 작심삼일이 아닌가 보네!'
정작 운동이 필요한 것은 바로 나 인 것 같다. 농사짓는다고 날마다 육체노동을 하고는 있지만 요즘에는 늘어난 뱃살도, 몸무게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운동과 노동은 전혀 다른 거라고 하니까. 그래서 핑계 김에 아들과 함께 저녁마다 걷기로 했다. 물론 아내도 이따금 한 번씩은 동참을 한다. 걷기는 아들이 퇴근하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시작한다. 다행히 이 길에는 가로등이 두 곳에 있어 희미하나마 길을 비추어준다. 처음 운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햇빛이 남아 훤했는데 지금은 해가 짧아져서 완전히 한밤중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막상 운동을 해보니 200미터밖에 안 되는 짧은 길을 반복해서 걷는다는 것이 여간 지루한 게 아니다. 한 시간 동안 걸으려면 같은 길을 십여 번 왕복해야 하는데 보이는 건 희미한 불빛뿐이니 웬만한 인내심으로는 지속하기가 어렵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라도 있어야 시간이 빨리 지나갈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예전부터 내가 아들과의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식 공부는 못 가르친다고 하는데 (또는 자기 아내 운전교육은 못 시킨다고 하는데), 시골에 내려온 직후 겁도 없이 고등학생이던 아들 공부를 가르친다고 대들었다. 평소에 별로 대화도 없던 부자지간이었는데 갑자기 공부를 가르친다고 나섰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난 잘 모르고 있었는데) 아내 말에 의하면 내가 아이를 달달 들볶았다고 한다.
하긴 그 모난 성격이 어디 갈까? 결국 중간에 포기를 했고 아들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졌다. 나야 가해자였으니 그 당시 일을 다 잊어버렸다지만 아들에게는 오랫동안 상처가 되었을 것 같다.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다.
지금은 아들도 다 컸고 주절주절 이야기도 잘한다. 회사 얘기도 하고 장래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따금 저녁식사 도중에 이야기가 길어지면 온 식구가 한 시간씩이나 식탁에 앉아있기도 한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로만 알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생각이 깊다. 이따금은 내 경험도 이야기를 해준다. 꼰대 짓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혹시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주말에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운동을 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옆집 아주머니가 우리를 보시고는 "아들과 운동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네요" 하신다. 나 역시 은근히 든든한 마음이다. 이런 게 다 큰 자식들을 곁에 둔 부모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처럼 대화를 많이 하는 가족은 없을걸?"이라는 나의 말에 아들은 "맞아요. 제 친구들도 아빠 하고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데요" 한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봐도 나 역시 아버님과 대화란 것을 한 기억이 거의 없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으면 나는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고, 어머니는 중재자가 되어 아버님께 전달해 드리곤 했다. 지금도 내 주위를 둘러보면 엄마와 딸이 친구처럼 지내는 분들은 많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아들이 가깝게 지내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언제까지 온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머지않아 제 길을 찾아 떠나겠지. 하루하루가 새롭고 소중한 날들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창세기)
<대문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