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 팔자가 최고다
그동안 컴퓨터 모니터를 보거나 운전을 할 때면 눈이 좀 침침한 것 같았다. 나이 드니 눈부터 증세가 나타나는가 보다 했다. 그래서 평소에 무시했던 비타민도 먹고, 특별히 눈에 좋다는 루테인까지 챙겨 먹었다. 언제까지 살지는 몰라도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건강하려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단골 안경점에 찾아갔다. 단골이 좋은 점은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지난 기록을 전부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그곳에서 안경을 처음으로 구입한 게 2009년이라고 하니 나도 참 무던한 단골이었던 것 같다.
"안경을 바꾸신 지 만 2년이 넘었네요. 어르신 같은 경우에는 해마다 안경을 바꾸시는 게 좋아요!" 나처럼 젊어서부터 근시였던 사람은 나이 들며 원시로 바뀌는데, 그 과정에 눈이 오히려 좋아진다고 한다. 이번에도 안경 도수를 두 단계나 낮추었다. 안경을 바꾸고 나니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아직까지 생생한 나에게 어르신이라고? 이 집이 단골 안경점 맞나?
평균 수명이 길어졌고 웬만한 병은 다 고친다는 지금도, 이따금 뜻하지 않는 지인들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바로 몇 달 전까지 전화통화를 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는다. 평균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이 꼭 오래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에도 한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토요일 저녁 혼자 집에 있다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갔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지나온 삶을 이야기하다가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왔다.
하필이면 심장마비가 나타날 그 시간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구들이 조금만 빨리 발견을 하고 병원에 갈 수 있었으면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늙으면 좋으나 싫으나 아내와 함께 있어야 한다. 젊었을 때 아내 속 좀 썩인 사람이라면, 더 납작하게 엎드려서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 '젖은 낙엽'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아내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이 단순한 말에 모두들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그게 맘대로 되냐?"라는 자조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잘 나간다고 큰소리치던 녀석들조차 어쩌다 보니 모두 다 비슷한 운명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나야 시골에서 돈벌이도 못하고 식구들 고생시켰으니까 이렇게 산다 치지만.
그동안 잠자코 있던 심리학자들이 갑자기 소리 높여 말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렇게 살아온 우리 세대의 삶의 방식이 잘못된 거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진즉에 말해줄 것이지,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이제 와서 어쩌라고?
그래서 은퇴한 우리 장년의 남자들은 집에서도 왕따로 산다. 짧고 굵게 살겠다던 젊은 시절의 호기는 다 어디 가고, 이제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게 꿈이란다. 단 아프지만 말고!
어쩌면 내 팔자가 최고다. 난 그래도 하루 세 끼 아내가 해주는 밥 먹으며, 하루 24시간 아내 옆에 붙어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P.S. 영화 '위크엔드 인 파리' (Weekend in Paris)의 사진을 넣었다. 아이들 다 키워놓고 은퇴한 장년 부부가 결혼한 지 30주년을 맞이하여, 신혼여행지였던 파리에 가서 다시 시작되는 사랑의 이야기다. 때로는 티격태격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장년 부부들의 모습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