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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을 하나 더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쌍둥이 우체통을 만들었다.

by 새침이와 호돌이네

우리 본당에 계셨다가 지금은 다른 시골 성당에 부임하신 신부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예전에 만들었던 우체통을 하나 더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새로 가신 성당에도 우체통이 없나 보다. 아니면 예전에 내가 만들어 드렸던 우체통이 썩 마음에 드셨거나. "그럼요. 그까짓 우체통쯤이야..." 그래서 오랜만에 목공 작업을 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목공 작업이 뜸했었다. 특별히 만들어야 할 물건도 없었지만 취미로 하는 목공이다 보니 내 기분이 내키는 대로였다. 어떤 때에는 며칠이나 줄곧 목공 작업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흥미를 잃으면 몇 개월을 쉬기도 한다. 겨울에는 추우니 쉬고 뜨거운 여름에는 더우니까 쉰다. 물론 농사철에는 바쁘니 쉬고, 모기가 극성을 부리는 초가을에는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고 쉰다. 그렇게 온갖 이유를 갖다 대다 보면 어느새 몇 개월이 후딱 지나가 있었다.


"예전과 같은 크기이면 되고요, 단 벽에 못을 박지 않고 땅에 세워 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조건이 약간 까다로워졌다. 이번에는 '우체통 + 받침대'로 일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그래도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 아래에 놓을 우체통이라 제작이 쉽다. 비를 맞는 곳에 세워놓을 거라면 나무로는 우체통을 만들 수 없으니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창고를 뒤져보니 다행히도 예전에 우체통을 만들고 남은 나무도 페인트도 있었다. 트럭도 없는데 자재를 사러 가지 않아도 되니 번거로움은 피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예전에 만들었던 우체통 크기가 얼마였더라?

Resized_20210907_144132.jpeg 예전에 만든 우체통. 친절한 사무장 덕분에 쉽게 쌍둥이 우체통을 만들 수 있었다.

도면을 찾는데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물건을 만들든지 엉성하긴 해도 꼭 도면을 남겨놓곤 했는데 우체통 도면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두 번 다시 우체통 만들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도면을 버렸나?


어쩔 수 없이 성당에 전화를 해서 우체통 가로 세로 크기를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친절하게도 줄자가 포함된 우체통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크기만 비슷하게 대충 만들려고 했는데, 정확한 규격을 알 수 있었으니 새로 만드는 우체통도 똑같은 규격으로 만들 수 있었다. 과연 나중에 보니 완전히 빼다 박은 쌍둥이 우체통이 되었다.

20210921_124834-1.jpg 나무에 홈을 파는 일이 제법 번거롭다. 홈 하나 파자고 다른 장비를 꺼내기도 귀찮아서 끌과 트리머로 대충 팠다.

그래도 한 번 만들어 본 우체통인지라 디자인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제작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작 방법이야 예전과 동일하다. 합판으로 모양새를 만들고 몰딩을 붙여 마무리했다. 몰딩은 내가 아끼는 황삼목으로 만들었다. 황삼목은 옹이도 거의 없어 나뭇결이 곱고 향도 짙다.


우체통을 벽에 고정시킬 것이 아니니, 바람에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겁고 튼튼한 받침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묵직한 4x4"(four by four) 짜리 방부목을 사용하여 받침대를 만들었다. 받침대 다리는 나무의 양쪽을 절반씩 파서 끼워 넣었고, 기둥은 가운데 홈을 파서 끼워 넣었다. 홈을 파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덕분에 철물을 사용하지 않고도 아주 튼튼해졌다.

20211001_131022-1.jpg 우체통 전체 높이는 160cm 다. 서서 우체통 문을 열기에 편한 높이다.

우체통에는 예전처럼 파란색과 주홍색을 사용했다. 왜 우체통 하면 다들 주홍색을 칠하는지 모르겠다. 잘 모르는 나도 남들 따라 하고 있다. 그런데 받침대에는 무슨 색을 칠하지? 무슨 색이 좋을지 아내에게 물어봤다. "무슨 색이 있는데?" "연두색과 하얀색." 곧바로 아내가 말했다. "그냥 파란색 칠해! 딱히 칠할 페인트도 없으면서 묻기는..." 흰색이나 연두색이 좀 어색할 것 같기는 하다.


이번에도 'POST'라고 글씨를 새기는데 애를 먹었다. 스텐실 도안이 없으니 조금 두꺼운 달력 종이를 칼로 오려내어 도안을 만들고 과슈화 물감으로 칠했는데, 나중에 보니 물감이 번졌다. 티 안 나게 덧칠을 해가며 겨우 글자를 새겨 넣을 수 있었다. 과슈화의 장점은 덧칠을 해서 잘못된 부분을 감출 수 있다는 데 있다.


일단 제작은 끝났지만 지금 당장 우체통을 전달해드리기는 힘들 것 같다. 과수원에 은박지를 깔고, 사과 잎을 따주는 게 먼저다. 햇빛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하루라도 빨리 과수원 일부터 마무리해야 한다. 10월 들어서는 계속 날씨가 흐리고 비가 계속 오니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만들어 놓은 우체통이 어디 도망을 가는 것도 아니니까.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신부님이 계신 시골 성당에 다녀올 생각이다. 혹시 그때쯤이면 단풍이 물들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속리산에 한번 들러볼 수 있으면 더 좋고. 가을이 되면 단풍 구경 한번 가지 않는다고 아내로부터 잔소리를 듣곤 했는데 올해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속리산에 가 본 지도 벌써 10년은 되는 것 같다. 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인데도 그렇다.


가까운 사람을 자주 보기도 힘들고, 가까운 곳도 자주 가지 못하며 산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는데, 그저 생각만 있고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가 않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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