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인과 미개인의 차이 - 본인인증

문명인 인체 하며 살기도 힘들다

올봄에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교통사고를 내셨다고 한다. 평소에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고,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이니 자칫 방심하면 사고가 나기 쉽다. 더구나 대부분의 시골길은 도시와는 달리 '차도'만 있지,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인도'란 것이 따로 없다. 나도 그런 도로에서 후미등도 없는 경운기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서 아찔했던 순간이 있다.


그동안 나와 아들놈만 '운전자 보험'에 가입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작 보험이 필요한 사람은 와이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우리 식구 중에 운전이 제일 굼뜰 테니까. 없는 살림이니 그럴수록 더더욱 운전자 보험을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운전자 보험에 가입하려는데 뭐가 그리 복잡한지, 하마터면 중간에 가입을 포기할 뻔했다. 시골에서 산지 십여 년 되었다고, 이제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맞추어 살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0000318824 브런치.jpg 역설적이지만 시골에는 '어르신 전담창구'가 따로 없다. 전체가 다 어르신 전담창구이니까!


먼저 컴퓨터 앞에 앉아 필요한 사항을 하나씩 기입해가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보험료가 빠져나갈 통장 계좌번호를 기입하란다. 당연히 예전부터 써 오던 우리 집 생활비 통장 계좌번호를 넣었는데, 본인 명의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그간 내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면 족했는데, 앞으로는 서랍 속에 묻혀있던 와이프 통장으로 보험료를 매달 이체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번거롭기도 하지만, 과연 매달 잊지 않고 제때에 이체를 할 수 있으려나? 이럴 때는 상담사와 직접 통화해서 해결하는 게 상책이다.


전화를 걸었더니 ARS로 자동 연결되고,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니 계속 기다리라고 한다. 한 30분쯤 씨름하려니 슬슬 혈압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겨우 상담원과 연결이 되었는데, 보험료는 온라인으로 가입해야 저렴하지 상담사를 통하면 가격이 비싸진다고 한다. 한 푼이 아까우니, 기다린 보람도 없이 직접 가입하겠다고 하고 그냥 끊었다. 백수 주제에 매달 계좌 이체하는 번거로움쯤은 감수해야겠지...


오래된 와이프 통장 계좌번호를 입력하고 나서, 마지막 남은 관문이 있었으니 바로 '본인인증'이다. 그리고 '본인인증' 과정에서 문명인과 미개인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공인인증서는 내 이름으로 등록된 것 하나밖에 없다. 평생 가정주부로 살아온 와이프는 '공인인증' 없이도 그간 잘 살아왔다. 이제 와서 운전자 보험 하나 가입하자고 따로 공인인증을 만들기도 그렇고, 그나마 쉬워 보이는 것이 '카카오페이 인증'이었다. 그런데 인증방법이, 카카오에서 와이프의 통장으로 1원을 보냈으니, 통장에 찍힌 입금자명 4글자를 입력하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정말 쉬워 보였다.


그런데 당연한 얘기지만 와이프 통장은 온라인으로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농협 앱을 전화기에 설치를 했는데, 산 너머 산이라고 이번에는 통장 비밀번호를 입력하란다.


"글쎄, 비밀번호가 xxxx 인가?" "안되면 xxxx로 해봐!" 와이프가 기억하는 몇 개의 비밀번호를 찍었는데 모두 실패하고, 오류 횟수가 한도를 초과했으니 은행을 직접 방문하라고 한다. 쩝쩝... 몇 년 된 비밀번호를 기억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사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은행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 온라인 통장 개설은 나중에 하고, 일단 통장에 찍힌 입금자 명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컨트롤 타워가 되고, 와이프는 통장의 입금자명을 확인하려고 급하게 차를 몰고 현금인출기가 있는 마트로 달려갔는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통장에 남은 여백이 부족해서 통장부터 재발급받아야 한단다. 그래서 결국은 차를 돌려 농협까지 달려가서 통장을 재발급받아야 했다. 그리고 새로 발급받은 통장에 찍힌 4자리 암호를 확인한 다음 나에게 알려주었으니, 그 어렵게 확인한 암호 4글자는 바로 '검은 오이'다.


비록 반나절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합심하여 운전자 보험을 온라인으로 가입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우리 부부는 아주 미개인은 아닌 셈이다. 도시에서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겠지만, 경제활동을 하지 않던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외국에서 온라인으로 우리 상품을 구입하려다 인증 절차가 어렵고 복잡해서 포기한다고 하더니만, 그 심정 이해가 간다. 또 시골 은행들이 통폐합되어 이제는 은행 가려면 버스 타고 시내까지 가야 한다는 노인들의 푸념을 들을 지라면, 빠르게 변화해 가는 세상 속에서 노인들이 설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돈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 돈 내고 보험 가입하겠다는데도 왜 이렇게 복잡한 건지...


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만 당연한 거라고 한다 (이 친구는 은퇴한 지 얼마 안 됐다). 개인별로 '휴대폰'과 인터넷 뱅킹이 되는 '통장'과 '공인인증'은, 요즘의 신용사회를 살아가는 필수품이란다.


아마도 우리 부부가 너무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았나 보다. 언제부터 세상이 이렇게 바뀐 건지, 아직까지는 청춘이라고 자신만만해하던 나도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내 주위를 보면 (거의가 다 노인들 뿐이지만), 인터넷 뱅킹은 고사하고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입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문명인인 내가 대신 물건을 구입해 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버벅거리며 살아가는 것도 모르고 주위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경탄해 마지않으니, 앞으로도 우리 부부는 계속 문명인 인체 하며 살아가야 한다. "저 젊은 부부(?)는 은행도 안 가고, 집에서 컴퓨터로 다 한댜!"


우리 부부는 이런 사람이다.


P.S. 그나마 익숙하던 공인 인증제도가 폐지되었으니, 앞으로는 뭐가 어떻게 바뀔지 내심 은근히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