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작게 기획한 공연이 열렸다. 자주 가는 카페의 2주년을 맞이해 열린 플루티스트 지윤 님과 피아니스트 안예솔 님의 듀오 공연이었다. 두 연주자가 들려주는 편안함이 있다.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쌓아온 이해와 번뜩이는 호흡은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한 카페가 지나온 2년이라는 시간과 연주자들이 함께해 온 10년이 넘는 시간, 자연히 꾸준함을 떠오르게 만든다.
꾸준함은 뭘까? 나는 꾸준함을 생각하면 강박이 함께 떠오른다. 그러니까 꾸준함을 완벽한 상태로 생각하는 것일 테다. 하루도, 한 시간도 빠짐없이 무언가를 하는 것에 대해. 하지만 잘 살펴보면 꾸준함은 원래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진짜 삶에서의 꾸준함은 가끔 놓치고 쉬어가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힘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내게는 하루도 빠짐없는 실내 사이클과 글쓰기가 필요하다기보다는 하루 이틀, 어쩌면 며칠 정도는 빼 먹어도 다시 실내 자전거 위에 올라가고 다시 문서 창을 여는 일인 거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자주 어떤 강박에 휩싸인다. 계획과 다짐 사이에서 혼자 지치기도 한다. 자조만 늘고 지금에 집중을 못 하는 일도 생긴다. 잠으로 도피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러다 과수면으로 인해 며칠은 또 불면이다. 여전히 나는 꾸준함을 내 걸로 만들지 못한 상태다.
한편, 살아있는 모든 게 꾸준한 상태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자주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데, 아침에 집을 나와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같은 지하철에 타거나 내리는 사람, 작업실 옆방 사람,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계산하고 나오는 사람들 모두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거는, 그러니까 사람의 꼴을 갖추고 난 이후로 한 번도 살아있지 않은 적이 없다는 얘기인 것이다. 나는 그게 놀랍고 신기하다. 각자 심장이 뛰어서 어떤 형태로든 움직인다는 게 꾸준함 그 자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꾸준함은 이처럼 별게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많은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무엇일 거다. 그럴 때면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 꼭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력해질 때도 있지만 나 바깥의 무수한 삶들이 무탈히 움직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곤 한다. 다툼도, 사랑도, 인정도, 미움도 다 삶이라는 기반 위에서 발생하는 거니까 우리는 볼 꼴 못 볼 꼴 다 보더라도 살아야 한다.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술 한 잔 같이 해보지 못했고, 아빠가 아빠 말고 한 사람으로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제대로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아빠가 지금 내 모습을 봤다면 응원해 줬을까? 혹은 지금 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을까? 사실 아빠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진다. 큼직큼직한 덩어리만 남아있는 기분이다.
그런 틈 사이에서 아빠의 흔적이 종종 너무 세세하게 떠올라 어쩔 줄 모르겠다. 아빠의 주름, 아빠의 머리카락, 뱃살, 아빠가 베던 배게, 아빠가 쓰던 족욕기 같은 거. 일부만 복원된 사진처럼 기억의 해상도가 이리도 널뛴다. 나는 죽음 이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삶 위에서 종종거리고 있다. 아빠가 보고 싶지만 이 감정 역시 삶 속에서나마 가능한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니까 삶이라는 꾸준함 위에서 너무 조급하지 않고 싶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지만 죽음 전까지 놓여있는 삶의 지평이 내 최대치이자 한계라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고 싶고. 만족과 충분하다는 감정이 내 노력 끝에 매달려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충분함은 이미 과정 속에서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삶을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이 삶이라는 걸 더 잘 이해하며 지내고 싶다. 앞으로 닥칠 일은 알 수 없고,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에서 더 많은 걸 배운다. 모르는 게 많아지는 일이야말로 꾸준함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