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꿈과 ECM
영화가 기록이 아니면 그것은 꿈이다. _ 잉마르 베리만
우리는 영화를 보며 체험에 직면한다. 그리고 체험은 작품과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를테면 영화의 이야기를 통한 체험일 수도 있고, 인물의 행동에 몰입하여 그와 일체가 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무엇이 되었든 확실한 것은 하나다. 그 체험과 경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꿈이라는 것을. 영화가 제시하는 수십만의 프레임은 꿈의 잔상인 것이다. 우리가 평생 동안 꾸는 많은 꿈들은 잊혀지지만 영화라는 꿈은 언제나 다시 찾아 꿀 수 있다. 그 영원히 간직될 꿈을 현대음악 레이블인 ECM의 음악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간에서 ‘현대 영화언어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장 뤽 고다르 감독과 ECM의 대표 만프레드 아이허가 1990년대부터 함께한 작업들은 그 꿈에 대한 각별한 인장을 새기는 것이었다. 고다르는 1998년 작품 <영화사>(Histoire du cinéma), <포에버 모차르트>(For Ever Mozart, 1996)등을 통해 ECM의 소리와 줄곧 함께했다. <누벨바그>(Nouvelle Vague, 1990)는 ECM에서 뉴 시리즈 라인업으로 사운드트랙을 발매했다. 눈여겨볼 것은 사운드트랙이 영화의 사운드를 그대로, 편집 없이 가져왔다는 점이다. 89분 길이의 영화 사운드를 두 트랙으로 나누어 앨범에 실었다. 만프레드 아이허는 영화가 사운드의 통합을 통해 내러티브를 전달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처럼 그가 앨범에 스코어가 아닌 전체의 오리지널 사운드를 담은 이유는 내러티브에 방해나 재단이 가미된 요소를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눈앞에 실재하는 이미지는 없지만 여전히 내러티브는 앨범에 고스란히 존재한다. 디노 살루치의 반도네온과 페티 스미스의 목소리, 데이비드 달링의 첼로 등 사운드트랙 안의 음악들 역시 내러티브의 한 축으로 작용한다. <누벨바그>라는 한 편의 꿈은 이처럼 그 어느 부분도 유실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ECM에서는 장 뤽 고다르와 안느 마리 미에빌의 단편영화를 묶은 단편집을 발매하기도 했다. 이 단편집에서는 고찰이 따르는 시네포엠과 시선이 존재한다. 이 단편집 중 <사라예보를 기억하세요>(Je vous salue, Sarajevo, 1993)에서는 미국의 사진작가 론 하비브가 1992년에 찍은 한 장의 사진과 고다르의 내레이션을 통해 유럽 문명의 어두운 자취, 그리고 문화라고 불리는 법칙에 투고한다.
문화는 법칙이며 예술은 예외다. 모두들 법칙을 쉽게 말하곤 한다. – 담배, 컴퓨터, 티셔츠, 티브이, 여행, 전쟁. 아무도 예외(예술)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예외는 쓰이고(플로베르, 도스토옙스키), 작곡되고(거슈윈, 모차르트), 그려지고(세잔, 베르메르), 영화가 되고(안토니오니, 비고), 살아진다. 법칙이란 예외의 종말을 원하는 것이다. _ <사라예보를 기억하세요> 중
법칙과 예외, 그리고 삶에 대한 고다르의 시선과 함께 아르보 패르트의 ‘Silouans Song’이 흐르면서 사진이 담고 있는 비극과 이야기가 조응한다. 덧붙여 비슷한 시기에 만프레드 아이허는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는데, 막스 프리쉬의 소설을 각색한 1992년 작품 <홀로세>(Holozän)가 그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글을 보았을 것이다. 그 글은 타르코프스키 퀄텟의 2017년 앨범 [Nuit blanche] 라이너 노트의 첫 장에 적혀있다. 잉마르 베리만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인데, 라이너 노트에 적혀있는 전문은 이렇다.
영화가 기록이 아니라면 그것은 꿈이다. 이것이 타르코프스키가 최고인 이유다. 그는 자연스럽게 꿈의 공간에서 움직인다. _ 잉마르 베리만
잉마르 베리만에 따르면 타르코프스키는 분명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가장 자유롭게 노니며 그것들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공간을 역량껏 보여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내러티브와 작중 시간의 해체, 재구성 역시 가능하다는 맥락과 상통하니 잉마르 베리만이 감독으로서 타르코프스키가 가진 능력을 격찬한 것과 같다. 이런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모티브와 중심축으로 삼은 타르코프스키 퀄텟은 자연스럽게 그의 영화와 흐름을 같이한다. ‘Nuit blanche’ ‘Rêve étrange…’등 앨범의 곡들은 전체적으로 꿈이 지닌 ‘영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영속성은 단순히 실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잊히지 않는 꿈이 지닌 일종의 흔적 같은 것이다. 이 흔적은 언제든 사라질 듯 하지만 우리가 자각하고 있지 않더라도 언제나 그곳에 머물러있다. 이 묘한 영속성은 프랑수와 쿠뤼리에의 전작 [Nostalghia – Song for Tarkovsky]과 그룹 동명의 앨범 [Tarkovsky Quartet]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장 루이 마티니에의 아코디언은 ECM 특유의 잔향과 맞물려 꿈의 공간을 직조함과 동시에 깊이감을 부여한다. 앞서 언급한 디노 살루치와 듀오 앨범을 작업했던 안야 레흐너의 첼로는 공간에 색채를 입히며 장 마크 라르세의 색소폰이 미장센을 배치해 청자에 따라 음악이 주는 공간이 구체적인 장소로 탈바꿈한다. 역설적인 것은 그 장소는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곳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라는 꿈이 가지고 있는 공간이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퀄텟의 음악이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The most beautiful sound next to silence)'
ECM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위의 문장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ECM의 모토인 이 문장은 가장 직관적으로 그들의 음악을 대변한다. 다큐멘터리 <Sound and Silence>(2009)에서는 5년 동안 만프레드 아이허와 동행하며 그가 소리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함께 작업하는 뮤지션들과 소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담아냈다. 프레임은 담백하며, 연출적인 요소는 직접적으로 돋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소리를 만들어내듯 그 모습을 프레임에 담은 것이다. 이 영화는 5년간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꿈이다. 그리고 이 꿈은 사라지지 않고 영화와 함께 발매된 사운드 트랙에서도 그것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ECM cata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