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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Mar 20. 2020

드가와 고흐, 그리고 도미닉 밀러의 압생트

'Shape of My Heart' 작곡가 도미닉 밀러의 2019년 앨범

 

(왼쪽부터)Edgar Degas - [Dans un Café] (1875-1876), Vincent van Gogh - [Café Table with Absinthe] (1887)

에드가 드가의 작품 <압생트 한 잔>에도,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압생트가 있는 정물>에도 압생트가 있다. 압생트라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독자라면 이 마주(魔酒)가 드가나 고흐뿐만 아니라 피카소, 오스카 와일드 등 과거 많은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인 영감의 원천이 된 술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도미닉 밀러의 앨범이 그런 압생트와 영향을 주고받은 또 하나의 작품이 된 것은 꽤나 새롭게 느껴진다. 그것도 앨범의 제목마저 [Absinthe]이니 말이다.     

Dominic Miller - [Absinthe] (ECM, 2019)

 도미닉 밀러가 프랑스 남부에서 지내며 작업한 이번 앨범에는 그가 생활하는 장소와 주변부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이 이채롭게 표현되어 있다. 첫 트랙 ‘Absinthe’에서 밀러의 섬세한 멜로디가 자리를 잡고 나머지 퀸텟 멤버들은 점진적으로 소리를 덧댄다. 마누 카체의 드럼이 조심스럽게 곡에 뿌리를 내리고, 동시에 산티아고 아리아스의 반도네온이 밀러의 핑거링과 내밀하게 교차하는가 싶더니 이내 곡은 다시 도미닉 밀러의 멜로디를 통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반도네온은 마치 눈에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환영처럼 튀어 오른다. 그러다가 어느새 전반적인 멜로디를 이끌고는 다시 그 자취를 감춘다. ‘La Petite Reine’에서 마누 카체의 드러밍과 도미닉 밀러의 멜로디는 반복적으로 진행되다가 마무리된다. 제목처럼 어린 여왕의 신비로움을 조심스럽게 속삭이듯이. 그는 나일론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의 혼용으로 곡마다 다양한 음색을 들려주는 동시에, 다른 멤버와의 조화를 고심한다.      

Dominic Miller - Absinthe

 도미닉 밀러의 압생트는 그를 혼미하고 정연하지 못한 무질서의 늪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음악적 실마리를 더욱 명확하게 해 주었다. 일종의 개안(開眼)의 역할을 한 것이다. 대신 압생트라는 술이 가진 일종의 환각은 마이크 린드업의 키보드를 통해 음악 속에서 청각적으로 제시한다. ‘Absinthe’의 중반부에 미묘하게 들리는 키보드의 바이브레이션은 마치 아쟁같이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이어지는 ‘Mixed Blessing’에서도 역시 작은 볼륨으로 새로운 분위기를 덧댄다. 마치 그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질적인 인상을 주려는 것처럼.     

 남미에서 자라는 나무 이름인 ‘Ombu’는 마치 이 나무의 거대한 뿌리에서부터 줄기까지 영양분이 이동하듯 도미닉 밀러의 기타가 진행되며, 동시에 니콜라스 피즈먼의 베이스와 마누 카체의 드럼이 활발하게 리듬을 주고받는다. 밀러의 멜로디는 산티아고 아리아스의 반도네온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다른 속성을 지닌 두 소리가 서로에게 확장되고 전이된다.     

이번 앨범의 모든 곡은 도미닉 밀러가 작곡했는데, 그의 앨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는 역시 멜로디이다. 기타 리프에서 시작하여 묘하게 확장되어가는 멜로디는 그의 ECM 데뷔작이자 전작 [Silent Light]와 마찬가지로 극적이고 구성진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가 곡을 맺는 방법 역시 멜로디와 서사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Mixed Blessing’이나 ‘Ténèbres’에서 그가 곡의 끝자락에 들려주는 현의 튕김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내포하고 있어 곡이 가진 서사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는 단순한 페이드가 줄 수 없는 밀도 높은 여음과도 같다. 도미닉 밀러는 이러한 음악의 구성이나 이야기하는 방법에 대해 스팅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언 한다. 

Dominic Miller - Etude

 앨범 [Absinthe]의 녹음은 프랑스 라 비손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2018년에 자라섬재즈페스티벌로 한국을 찾아온 콜랑 발롱 트리오의 2011년 앨범 [Rruga] 역시 이곳에서 녹음이 되었는데, 이번 앨범이 음악적으로 풍부한 인상을 지니게 된 요인 중 하나는 도미닉 밀러가 프랑스의 생활 속에서 받은 영감과 인상이 증발되지 않은 채로 같은 지역의 훌륭한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압생트와 그 영향 아래 놓였던 수많은 예술가들, 그리고 미스트랄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남부의 겨울바람은 도미닉 밀러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 분명하다. 채도가 빠진 하늘빛, 겨울에 머물러 있는 듯 건조한 도로와 가로수들이 환각의 무늬들로 뒤덮여 있는 앨범 아트만으로도 이번 앨범은 압생트의 예술적 주사에 대한 밀러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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