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영화와 만나다
다양한 영화에서 재즈가 쓰이곤 한다. 단순히 극과 어울리는 장식적인 의미로 재즈를 사용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지닌 역설과 아이러니를 대변하기도 하며, 그것을 관음하는 관객의 무의식에 재즈가 비집고 들어가기도 한다. 재즈는 영화의 주제로 활용 될 수 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템과 모티브를 넘나들며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독자분들은 아마 영화를 보면서 본인이 즐겨 듣거나 혹은 들어본 적이 있는 음악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을 알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영화에서 재즈를 발견하는 재미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다양한 영화를 다루기에 앞서 잠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중후반까지 미국에서 흥행을 누렸던 뮤지컬 영화에서는 소위 말하는 ‘스탠더드 재즈’가 빠지지 않고 사용 되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뮤지컬 영화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쓰인 곡들이 이후에 여러 재즈 아티스트들을 통해 연주되면서 스탠더드 재즈로 자리매김 했다고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 뮤지컬 영화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1937)>에서의 ‘Someday My Prince Will Come’과 뮤지컬 <Girl Crazy>의 넘버 ‘I Got Rhythm’이 대표적인 예다.
많은 인기를 얻었던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 2016)>는 과거 20세기 뮤지컬 영화에 대한 다양한 오마주와 함께 애시드 재즈, 잼 세션 등 재즈의 갖은 매력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재즈가 좀 더 다양화 되고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델로니어스 몽크 등 전설적인 재즈 아티스트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그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속속 관객들에게 선보여지기 시작한다.
야심한 뉴욕의 시가지. 원색의 네온사인 불빛과 거리를 적시는 비를 뚫고 노란 택시가 지나간다. 차창과 택시 운전사의 눈에는 밤 조명이 비치면서 웅장하고 거친 느낌의 인트로와는 사뭇 다른 테마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이쯤 되면 이미 어떤 영화인지 알아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첫 문장에서부터 짐작 할 수 있었을지도. 바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역작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다.
<택시 드라이버>는 1970년대 미국의 시대상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퇴역 군인이자 심야 택시 운전사인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 분)를 통해 보여준다. 트래비스라는 인물에게 내재된 광기와 혼란스러움이 당대에 대한 비유로 작용한 것이다. 얘기할 것이 많은 수작이지만 그중에서도 영화의 시작부터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바로 몽환적인 멜로디의 색소폰 연주다. 밤거리를 응시하는 트래비스의 시선과 배경에 깔리는 톰 스콧의 색소폰 연주는 러닝 타임 내내 반복적으로(악기나 곡의 구성을 바꿔가면서) 제시되며, 트래비스가 자신의 상황과 시대에 가지는 불만과 불안함을 대변하고, 동시에 그가 꿈꾸는 사랑과 이상향에 대한 다듬어지지 않은 동경을 내비친다. 결국 <택시 드라이버>라는 영화에서 주요인물인 트래비스의 정체성과 그가 맞닥뜨린 시대의 이미지는 시종 이 색소폰 멜로디를 기반으로 한 재즈를 통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택시 드라이버>는 버나드 허먼이라는 영화음악 대가의 유작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Vertigo, 1958)>과 <사이코(Psycho, 1960)>, 오손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등의 음악을 그가 맡았고, <택시 드라이버>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데이브 블룸이 녹음을 다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버나드 허먼을 대신해 나머지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에서는 해미(전종서 분)가 어스름한 하늘빛을 등지고 춤을 출 때 마일스 데이비스의 ‘Générique’가 흘러나온다. 카메라의 시선과 인물의 행위, 그리고 내면의 폭발성을 지닌 듯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블로잉까지 세 가지 요소는 굉장히 유기적인 형태를 이뤄낸다. 음악의 정서가 곧 장면의 분위기가 되며, 나아가 인물의 감정이라고 느껴질 만큼 내밀한 조화가 돋보인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에 대해서는 이후 연재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스윙걸즈(Swing Girls, 2004)>는 제목에서부터 영화와 재즈의 만남이 물씬 느껴진다. 영화에서는 애써 재즈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아도 다양한 스윙 재즈가 귀를 즐겁게 해준다. 과거 빅밴드에 대한 오마주를 발견하는 것은 <스윙걸즈>를 보는 또 하나의 묘미다. 물론 이 영화의 백미는 급조된 빅밴드의 여고생들이 뒷박에 강세를 넣는 일명 ‘스윙감’을 찾으면서 점차 빅밴드의 구색을 갖춰 음악제에 참여하여 빅밴드 스윙 곡인 글렌 밀러의 ‘Moonlight Serenade’, 켄 우드맨의 ‘Mexican Flyer’, 그리고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을 연달아 좋은 협주로 선보이는 엔딩 장면일 것이다.
엔딩 무대에서 영화는 스윙재즈를 흠뻑 들려줌과 동시에 재즈가 가진 즉흥연주라는 특성을 담아냈다. 원래 스윙재즈에서 솔로 즉흥연주는 크게 부각되지 않고 소극적으로 행해지는데, 감독은 재즈의 가장 큰 특성인 즉흥성과 각자 악기별로 지닌 캐릭터성을 솔로 즉흥연주(연주되는 곡의 멜로디를 기반으로 한 테마솔로)에 빗대어 보여주었다. 모두가 곡의 이름은 모를지라도 다같이 네박자에 맞춰 박수치고 몸을 흔든다.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대사가 나온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해. 스윙을 연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 대사는 ‘공작’ 듀크 엘링턴의 곡 ‘It Don’t Mean a Thing(If It Ain't Got That Swing)‘ -스윙이 없다면 의미는 없다–을 연상케 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재즈 아티스트가 주제인 영화는 20세기부터 다양하게 관객들을 만나왔다. 빅밴드의 신화적인 존재인 트롬보니스트 글렌 밀러의 이야기를 다룬 <글렌 밀러 스토리(The Glenn Miller Story, 1954)>, 그리고 명배우 포레스트 휘태커가 비밥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연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버드(Bird, 1988)>등이 있다. 재즈 아티스트를 전면에 담아낸 영화들에서는 당연히 그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최근 작품에는 쳇 베이커의 음울한 생애와 재기를 보여준 로버트 뷔드로 감독의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 2015)>와 마일스 데이비스가 대중에서 사라진 5년을 조명한 돈 치들 감독의 <마일스(Miles Ahead, 2015)>가 있다. 이 두 작품 모두 실제 아티스트들의 모습을 기반으로 하여 영화적 상상이 가미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새롭게 해석된 두 아티스트의 음악을 만나볼 수 있다. 분명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사진 출처 : IMDB,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