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로 돈 벌기

시간을 존중하는 일

by 조원용

기타리스트 지미 레이니의 트리오 앨범 [Momentum]은 그의 삶을 차분하게 대변한다. 13살에 컨트리와 재즈 사이에서 재즈를 선택한 이후 미성년자 때부터 켄터키 더비의 본거지인 처칠 다운스의 클럽하우스 밴드로 일하기도 한 지미 레이니는 당시 거의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버드)에 감화됐다. 비슷한 시기에 모던 재즈의 문양을 만들고 있던 피아니스트 제리 월드와 알 헤이그 덕분이었다. 헤이그는 지미를 할렘과 52번가로 데려가 이들의 연주를 듣게 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켄터키 루이빌로 돌아와 폐관 수련을 했고 이후에는 시카고로 이동해 삼촌, 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리 코니츠, 레니 트리스타노와 공부했다. 우디 허먼의 ‘세컨드 허브’라는 빅밴드를 스탄 게츠, 서지 찰로프와 함께 했지만 지미는 길 위에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이동도 이동이고, 잠깐의 솔로를 기다리기 위해 앉아있는 일이 유쾌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런 심경을 극복하면서 아티 쇼, 테리 깁스, 레드 노보 등과 함께하며 차근차근 역량을 쌓아나갔다.


이런 지미 레이니를 다시 평가하게 만든 연주자는 비브라포니스트 테디 찰스였다. 그는 지미 레이니가 찰리 크리스천의 유산을 ‘처음으로‘ 깊이 이해한 기타리스트 중 한 명이고, 그의 코드 연주는 단순히 흐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노래처럼 들린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는 존 콜트레인이나 마일스 데이비스, 길 에반스가 탐구한 화성적인 사고를 지미 레이니가 예견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자주 그렇듯 비평의 호응이 상업적 성공을 대변해 주는 건 아니고 지미 레이니의 앨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재즈로 생계를 유지하는 게 어렵고, 부업처럼 생각하면 계속할 수는 있지만 그럼 무언가를 잃게 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미는 음악과 관계없는 일용직, 나이트클럽, 보컬 반주, 브로드웨이 밴드 일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의 연주를 이어갔다.


그렇게 긴 휴지기 이후 1972년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기타로 ‘아름다운 논리’ 위에서 펼쳐지는 라인으로 주목받았고, 스탄 게츠 퀸텟의 중요한 일원이 됐다. 그리고 2년 후 7월, 지미 레이니는 자신의 트리오 앨범 [Momentum]을 녹음한다. 이성적이면서도 연주자들 간의 내밀한 호흡, 멜로디 근방을 맴돌면서 흐름을 놓치지 않는 긴장감과 여유. 작곡과 작사를 동시에 했지만 가사 없이 녹음한 레이니의 'We'll Be Together'은 20살의 내게 어둡지만 꺼지지 않는 기름불처럼 은은한 힘이 됐다.


나도 재즈로 먹고살고 싶다. 연주자도 아니고 제작자도 아니지만 처음 재즈에 대한 글을 쓸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재즈가 정말 좋으니까. 그게 일이 되어도 감출 수 없는 기쁨 같은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일하는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재즈가 하고 싶으니까. 그게 되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하고.


하물며 나도 그런데 연주자들은 어떨까. 나의 진심을 비할 바 없이 그들이 한 곡을 위해, 한 프레이즈를 위해 쏟은 시간은 길고 지난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 살고 싶게 만드는 연주를 들려주는 연주자들이 그 가치에 합당한 것들을 받길 바란다. 그런데 납득할 수 없는, 혹은 납득을 시도조차 할 수 없게 아무 대응 없이 연주비를 지급하지 않는 사례가 마치 관행처럼 이어져 오고 있다. ‘연주비’에서 ‘비費’에 대해 살펴보면, 어떤 생산 활동을 위해 소비되는 돈, 생산 요소나 생산재에 지불되는 대가를 뜻한다. 그러니까 연주비를 대수롭지 않게 주지 않는 거는 연주에 생산 요소('Element')가 없다고 판단하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그 연주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 연주로 조성하고자 할 업장의 분위기라는 게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설령 업장에서 연주가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어도 그건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주요한 ‘요소’가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상업 시설을 꾸리는데 생산재와 생산 요소에 합당한 돈을 사용하지 않는 걸 우리는 ‘체불’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건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마찬가지다.


항간에서는 ‘재즈 클럽에서 연주는 애초에 돈을 생각하고 하면 안 되고, 그러니 체불에 대해 논하는 건 재즈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이며 진정한 재즈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나는 이 말이 놀랍다. 그가 재즈를 잘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재즈의 순수성이 이렇게 쉽게 정의되는 것인지는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무언가에 대한 정의를 모범답안처럼 제시하는 경우에는 ‘사짜’이거나 ‘사이비’인 경우가 많다고 나는 생활 속에서 여러 번 배웠다. 물론 그게 개인의 생각에만 그친다면 그걸 침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재즈의 순수성은 이거니까, 너희들은 진짜 재즈를 하는 게 아니다’라고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진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진실이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본래 진실은 무너지고 쌓이는 것을 반복하며 외부의 자장과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이 큰 차이다).


나는 듀크 조던이 뉴욕에서 택시 기사를 하지 않고도 연주를 계속할 수 있었길 바랐고, 지미 레이니가 음악과 관련 없는 일용직을 하지 않고도 새로운 곡을 만들 수 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그건 지금 나와 같이 숨 쉬고 있는 연주자들을 바라볼 때도 같은 생각이다. 그것은 그들이 전달한 연주와 진심, 시간을 존중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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