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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B 마케팅, 왜 산업마다 전략이 달라야 할까?

초고가 장비·범용소재·SaaS, 완전히 다른 게임의 법칙

by 김종혁 강사

B2B 마케팅은 단순히 기업에게 제품을 파는 행위를 넘어, 고객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계하고 유지할지에 대한 총체적인 전략입니다. 고객사의 규모와 특성, 제품의 가격과 성격에 따라 마케팅의 '게임의 법칙'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수천억 원짜리 장비부터 몇백원짜리 볼트까지, 모든 B2B 제품이 동일한 방식으로 판매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같이 한번 확인해 보실까요?


초고가 장비 시장에서의 고객 관리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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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ASML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공급한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한 대의 가격은 약 2억 달러(2,600억원)에 달합니다. 단 한 대만 팔아도 제가 5년정도 다녔던 중견기업의 연 매출에 맞먹는 규모이며, 영업이익률은 무려 32%에 달합니다. (2024년 기준) 국내 전력설비 업체인 일진전기의 고압변압기 역시 한 대당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을 호가합니다. 이런 초고가 장비 시장에서는 '단 한 명의 고객 (Account)'이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수도 있습니다. 얼마전 B2B마케팅,영업교육을 받았던 모 대기업 신입사원의 말이 기억납니다. "강사님, 그러면 한놈만 잘 걸리면 되네요." 실제로 ASML의 경우 전 세계 반도체 3대 기업(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이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죠. 이들 기업이 설비투자 계획을 바꾸거나 경쟁사 제품으로 전환하면 ASML의 실적은 즉시 타격을 받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현재 기준으로, EUV 노광장비를 양산 수준에서 공급할 수 있는 기업은 사실상 ASML이 유일!!) 그래서 이런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은 철저하게 '어카운트 중심(Account-Based Marketing)'으로 설계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어카운트 관리는 단순한 고객 응대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B2B벤더는 고객사내 조직도를 세부 팀 단위까지 파악해야 하며, 각 팀별 의사결정권자들의 성향과 기술적 선호도까지 데이터베이스화 해서 관리해야 하죠. 고객사 내부에서 전략이 바뀌거나 새로운 공정기술 개발방향이 결정되면, B2B벤더사 영업팀은 해당 정보를 실시간으로 입수해 자사 제품 로드맵에 반영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요 고객사의 5년, 10년 기술 로드맵을 함께 그려나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단순히 제품을 파는 관계가 아니라 고객의 미래 전략을 함께 설계하는 파트너 관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각 주요 고객사(Key Account)마다 전담 엔지니어링 팀과 비즈니스 개발팀, 서비스팀을 운영하며, 이들이 고객사 내부 회의에까지 참석해 기술적 조언을 제공할 것 입니다.


일진전기나 효성중공업도, 한국전력공사라는 거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오랜 세월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관계 구축에 투자해왔을 겁니다. 한번 납품업체로 선정되면 교체 비용(전환비용 : Switching Cost)이 천문학적이고 안전성과 호환성 문제로 쉽게 바꿀 수 없어 장기간 안정적 매출이 보장되죠. 이것이 바로 '어카운트 관리(Account Maintenance)'의 핵심입니다. 한편, 최근 북미 시장에서는 AI 산업의 급성장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1970~80년대에 설치된 노후 전력 설비의 교체 수요까지 겹치면서 변압기 및 송배전 장비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랜 기간 보수적으로 움직이던 글로벌 전력 인프라 시장에서 보기 드문 ‘골든 타임’으로, 기술력과 납품 실적을 바탕으로 한 기존 공급업체들에게는 전례 없는 성장 기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덩치큰 고객을 한놈이 아니라 여러 놈들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입니다.


가격이 곧 승부처인 범용 소재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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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레미콘이나 볼트·너트 같은 화스너, 페인트, 플라스틱 원재료, 포장재, 전선, 기초 화학소재, 산업용 가스등의 시장은 완전히 다른 게임입니다. 삼성물산이나 현대건설 같은 대형 건설사들도 레미콘 공급업체를 선정할 때는 '가격'을 주로 볼겁니다. 품질 차이가 크지 않고 전환 비용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국내 주요 레미콘 업체들은 프로젝트별로 입찰에 참여해 최저가를 제시해야 계약을 따낼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요소는 가격만이 아니겠죠. 안정적인 공급망(Supply Chain) 구축과 효율적인 유통 및 서비스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레미콘은 생산 후 90분, 20km 이내에서 타설이 이뤄져야 하는 ‘시간과 거리의 게임’입니다. 그래서 공장은 현장 가까이에 있어야 하고, 교통 상황에 따라서는 굳는 속도를 늦춘 특수 레미콘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날씨도 변수죠. 더우면 수화 반응을 늦추고, 추우면 빨리 굳게 하며, 습하면 배합을 조정해야 합니다. 결국 승부는 공급망과 물류, 서비스가 얼마나 촘촘하게 맞물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GPS로 배차를 최적화하고, 출고 전 품질을 점검하며, 문제 발생 시 즉시 대응하는 민첩함이 곧 신뢰입니다. 레미콘 시장에서 경쟁력은 공장 규모뿐만 아니라 ‘제때, 제대로’ 가져다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 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시장 상황에서도 납기일을 정확히 지키고, 필요한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은 단순한 가격 경쟁력을 넘어선 신뢰를 형성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화스너 유통업체인 패스널(Fastenal)은 일찍부터 공장·현장에 설치해 공구·소모품을 즉시 지급·자동 관리하는 시스템인 '산업용 자판기 (Vending Machines)', 고객사 내부에 전용 매장과 직원을 상주시켜 재고와 조달을 직접 운영하는 '온사이트(Onsite) 솔루션'을 활용하여 시장을 선도하며 산업재, 건자재 종합 유통업체로 성장해왔습니다. 이는 고객의 구매 프로세스를 간소화시키고 총 구매 비용(Total Cost of Ownership)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런 시장에서는 전통적인 영업사원 중심의 관계 마케팅보다는, 효율적인 유통망 구축과 원가 경쟁력 확보가 핵심입니다.


구독경제 시대의 SaaS, 새로운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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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급성장하는 B2B SaaS(Software as a Service) 시장은 또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겠죠. '세일즈포스'나 '핑거세일즈' 같은 기업용 소프트웨어는 초고가 장비처럼 부담스럽지도 않고, 범용 소재처럼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직원 1인당 월 2만 원대의 요금으로 사용 가능한 CRM SaaS '핑거세일즈'는 대형 장비보다는 상대적으로 구매부담이 덜 하죠. 하지만 한번 도입하면 직원 데이터와 영업 데이터가 시스템에 축적되어 전환 비용이 절대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래서 IT 업체들은 초기 도입 단계에서 더 큰 혜택이나 할인 조건을 제시하며, 고객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자물쇠 효과(Lock-in Effect)’를 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B2B SaaS는 구독 기반의 반복 매출 모델이기 때문에 '고객생애가치(LTV, Life Time Value)'를 극대화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SaaS 기업들은 초기 고객 획득(Customer Acquisition)뿐만 아니라 이탈 방지(Churn Reduction)와 업셀링(Upselling)에 동시에 집중해야 합니다. SaaS 기업은 고객의 사용 데이터를 분석하여 이탈 징후를 미리 감지하고, 맞춤형 콘텐츠나 업셀링 제안을 하는 데이터 기반의 예측 및 개인화 마케팅을 적극 활용합니다. 허브스팟(HubSpot)이나 마케토(Marketo) 같은 마케팅 자동화 도구를 적극 활용해 리드 생성부터 고객 전환, 유지까지 전 과정을 데이터로 관리합니다. 국내 SaaS 기업인 아임웹의 경우, 콘텐츠 마케팅으로 잠재 고객을 유입시키고, 무료 체험판으로 전환율을 높이며, 고객 성공팀(Customer Success Team)을 운영해 고객 만족도를 극대화하고 이탈을 방지하는 통합적 접근을 취합니다. 이는 고객 유지가 신규 획득만큼 중요하다는 SaaS 비즈니스 모델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디지털 마케팅 적용의 차이

B2B 기업이 산업별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획일적인 디지털 마케팅 전략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입니다. 저 역시 과거 한 중견기업에 근무할 당시, 기업 규모와 업무 방식에 맞지 않는 고가의 외산 IT 솔루션을 도입했던 사례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외국어 기반의 복잡한 UI, 이해하기 어려운 기능 체계, 그리고 사내 업무 프로세스를 해당 솔루션에 맞추기 위한 문서 작성과 매뉴얼 제작에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산업 특성과 조직 환경을 무시한 도입은 오히려 디지털 전환의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EUV 장비나 고압변압기 같은 초고가 장비 업체들은 잠재 고객이 전 세계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이런 기업이 구글 검색광고나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마케팅에 예산을 쏟아붓는 것은 당연히 비효율의 극치겠죠. 차라리 주요 고객사의 의사결정권자들과 직접적인 관계 구축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 입니다. 반대로 화스너나 페인트 같은 범용 소재 업체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효율적인 유통과 가격 비교 서비스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B2B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산업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수립하는 일입니다. 초고가 장비 업체라면 소수 핵심 고객과의 깊이 있는 관계 구축이 핵심이며, 범용 소재 업체는 가격 경쟁력과 효율적인 유통망, SaaS 기업은 데이터 기반의 고객 여정 관리에 집중해야 하죠. 디지털 마케팅 도구가 아무리 발전해도 산업의 본질적 특성을 무시한 채 유행만 좇는다면, 이는 시간과 자원의 낭비일 뿐입니다. 따라서 각자의 비즈니스 모델에 최적화된 마케팅과 세일즈 전략을 세울 때 비로소 진정한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별 전략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완전히 단절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타 산업의 강점을 유연하게 흡수하고, 이를 경쟁사보다 한 발 앞서 적용하는 기업은 오히려 그 자체를 강력한 무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범용 소재 기업이 SaaS 기업처럼 고객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분석한다면, 단순 가격 경쟁을 넘어서 ‘신속한 대응’과 ‘맞춤형 제안’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초고가 장비 기업이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기술 신뢰도와 고객 이해도를 높인다면, 관계 중심의 영업에서 고객사의 젊은 세대들과도 강한 시너지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B2B 마케팅의 본질은 산업 특성을 충실히 반영하되, 경계를 뛰어넘는 전략적 융합을 통해 차별화된 경쟁력을 창출하는 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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