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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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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Feb 07. 2022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배려 깊은 남자가 배려 깊은 여자를 만난다.



엊그제 저녁,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들램이 알아서 숙제를 척 끝내 놓더니 갑자기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들, 왜 그래? 뭐하려고?”


“엄마, 제가 설거지해 드릴게요. 매일 엄마만 설거지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같이 해야 맞죠.”


목소리까지 내려 깔며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어쭈, 이눔 봐라. 그동안 양성평등 조기교육 시킨 보람이 있군' 하며 내심 흐믓했으나, 늦은 시간이었고 잠자리 독서 시간이 미뤄질까 싶어 몇 개 안되니 내버려두라고 했다. 좀 더 많을 때 하라고. 평상시에도 한 번에 말 듣는 법이 없는 아이인데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네 살 무렵 호기심 반 물놀이 반, 몇 번 설거지를 해본다길래 맘껏 적시며 놀게 놔둔 적은 있지만 이토록 진지하게 제대로 설거지를 하겠노라며 앞치마를 뺏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기름기 잔득 묻혀 놓은 그릇들이며 물통들 프라이팬까지 난이도 '중'의 설거지 감들이다. 아들이 설거지를 시작했다. 풍성한 거품으로 쓰윽 쓰윽.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젠 꼼꼼하게 헹구어 내야 하는데, 거품만 안 보이면 다 된 것처럼 물에 스쳐간 식기들을 건조대에 올려놓는다.


"아니, 아니!! 다시 꼼꼼하게 여러 번 헹구자"


하면서 끼어들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누르고 그냥 지켜본다.


옷은 팔꿈치까지 다 젖고 싱크대 앞에는 물이 흥건하다. 아직도 미끌미끌할 것 같은 그릇들은 순서도 모양도 맞추어지지 않은 채 건조대에 질서 없이 쌓였다. 아들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웃음만 나온다. 그래도 끝까지 다 해낸 아들이 기특하다.


뿌듯한 마음으로 아들과 침대에 누웠다. 잠자리 독서를 시작하려는데,


"엄마~~~~"


"왜애~~~~"


"제가 내일 사 먹고 싶은 젤리가 있는데요~"


"젤리? 요즘 군것질 너무 심해서 젤리 끊기로 했잖아"


"아는데요, 그 젤리는 너무 먹어보고 싶어요. 지난번에 친구들 다 먹는데 저는 돈 안 가져가서 못 먹었어요. 내일 꼭 사 먹어 보고 싶어요"


요즘은 아들 배가 살짝 나오고, 충치도 자주 생기는 것 같고, 주식보다 군것질로 배 채우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터였다. 엄한 표정을 지으며 안된다고 강하게 말하려는 찰나.


"제가 엄마 설거지도 도왔잖아요. 옷도 다 젖어가면서 설거지했잖아요. 내일 딱 한 번만 사 먹고 안 사 먹을게요. 제발요 엄마~~~"



그럼 그렇지.

이제 갓 아홉 살 아들 눈에 갑자기 가사노동에 지친 늙은 애미의 등짝이 안쓰러웠을 리가 있나. ㅋㅋㅋ웃음이 났다. 대뜸 어른스럽게 설거지를 해주겠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엄마~~ 하며 비음 섞인 목소리로 길게 늘여빼며 엄마를 불렀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너는 계획이 다 있었음을 .


 나름 양성평등 교육으로 집안일은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며, 먼 훗날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 고생시키지 않게 노력한 결과가 벌써 나오는구나 하며 뿌듯해했던 내가 살짝 민망하다 . 설거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들 하나는 잘 키웠다며 스스로 쓰담쓰담했던 내가 참 천진스럽다. 아들은 또 어떠한가. 천삼백 원짜리 젤리 하나 먹어보겠다고 엄마의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의젓한 배려남 행세를 했던 아들도 너무 귀엽다.


어쨋든 결론은 이러했다.

배려 깊은 아들을 키웠다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육아 스트레스가 한방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는데......


음 하하하하하하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



양치질을 잘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내일은 젤리 살 용돈을 주기로 했다. 잠시나마 아들 덕에 행복했던 대가로 믓찌게 친구들것까지 통 크게 쏴버렸다.



그래도 나는 아들을 믿는다. 배려 깊은 남자로 커 나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만큼 배려 깊은 여자를 만날 것이라는 것을.




© alexas_fotos,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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