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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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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Jan 17. 2022

작가의 서랍에 침입자가 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생긴 버릇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생긴 버릇이 있다. 아마 글 쓰는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을 "그 버릇". 글을 쓰기 이전에는 별 감흥 없이 스쳐 지나던 것들이 죄다 글감으로 보이는 현상을 경험한다. 순간순간 포착되는 글감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마를 소환한다.


브런치 앱을 켠다.

보이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일단 글감만 써서 해마의 안장에 얹힌다.


아직도 나의 뇌가 40대의 기능 정도는 될 거라 확신하면서 "제목만" 적는다. 제목을 보면 내가 무슨 얘기를 쓰려고 했는지 응당 기억날 거라는 무담보 확신을 가지며 일단, 적는 것이다.


이랴~~~ 글감을 얹은 해마가 잘도 뛰어간다.


일하다가도 쓰고

아이 숙제를 봐주다가도 쓰고

설거지 하다가도 쓰고

청소기 돌리다가도 쓰고

드라마 보다가도 쓰고

밥하다가도 쓰고

심지어 걷다가도 쓴다.


그렇게 나의 해마가 단기 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배달 사고 없이 열심히 운송하고 있다고 철저히 믿으며 쓰고, 또 써본다.


뜨그닥 뜨그닥. 이랴~





당장 쓰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할 일을 모두 마친 후, 글을 쓰고자 브런치 작가의 서랍을 열어본다.



생경하다.

누가 내 서랍을 다녀간 것이더냐

이 글감들은 대체 누가 써 놓은 것이란 말이더냐


서랍장이 뒤져진 채,

낯선 단어들이 나뒹굴고 있다.

정체 모를 글감들만 남은 채

내용들이 몽땅 도난당한 것이다.

당장 cctv를 돌려 침입자를 확인하라~~



작가의 서랍장 cctv 정밀 분석 결과,

드나든 이는 주인장뿐이로다.



어허이~

귀신 곡할 노릇일세!!!

과연 이 생경한 글감은

누가 써 놓은 것이란 말이더냐

또 내용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더냐



혹여

해마가 한 짓인가


해마를 소환해 아무리 주리를 틀어봐도 당최 무슨 연유로 이러한 글 제목을 적어 두었는지 실토하지 않는다. 내용물은 애초부터 담겨있지 않았다며 도난 혐의를 극구 부인한다.



이번 서랍 도난 사건은 서랍 주인장의 해마와 뉴런 시냅스들의 단백질 부족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단기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한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수사는 종결되었다.


그래서 요즘 서랍의 주인장은 해마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서너 줄 정도 티저를 써놓는 예를 갖춤으로써, 퇴화된 뇌기능의 자책감을 덜어보고자 노력한다. 또한 육퇴 후 알코올 습작을 지양하고, 양질의 단백질 섭취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해마의 정보 운송 효율을 도우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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