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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Must Believe In Spring

Bill Evans

by 최은창






평생에 걸친 빌 에반스의 연주를 통틀어서 한결같이 지속된 게 있었다면 아마도 연주에 깔린 깊은 슬픔일 것이다. 미디엄 업 정도의 템포로 스윙하는 곡에서도 슬픔은 명확하게 감지된다. 그의 특징적인 터치와 음색도 젊은 시절과 말년은 제법 달라져 있었다. 죽음을 향해가던 마지막 시기의 연주에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거칠음이 종종 섞여 들었다. 그의 정신상태와 건강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거대한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흔적은 여전했다.


스캇 라파로와 함께하던 젊은 시절의 연주에서도 그런 정서는 확연히 느껴진다. 1961년이면 그를 둘러싼 비극의 연속이 시작되기 전이었는데도. 1959년에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를 녹음하고는 이내 그를 떠나 그의 트리오를 결성했었다. 지금까지도 찬란하게 빛나는 두 장의 스튜디오 앨범 [Portrait in Jazz]와 [Explorations], 그리고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와 [Waltz for Debby]를 라이브로 녹음하던 시기라면, 젊음의 거침없는 패기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자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음악의 발현에 감격하는 것이 당연할 것인데 말이다. 사실 스캇 라파로의 연주를 들으면 그런 느낌이 드는데, 스캇 라파로는 충분히 그럴만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재즈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진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빌 에반스에게서는 시종일관 거대한 슬픔의 정서가 느껴진다. 다른 감정을 압도하는 슬픔의 크기가 있었다.


My Foolish Heart (V. Young)



빌 에반스라는 한 개인의 겪은 비극적인 일생이 어쩌면 이미 정해진 필연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빌 에반스는 스캇 라파로의 교통사고와 전 애인 일레인의 자살, 그리고 의지하던 형 해리의 자살까지 겪었다. <B Minor Waltz(For Ellaine)>는 자신의 변심을 견디지 못하고 지하철에 뛰어든 일레인을 위한 곡인데, 슬퍼도 너무 슬픈 곡과 연주이다. 1973년의 일레인의 죽음과 1977년의 <B Minor Waltz> 녹음 사이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 그 기간 동안 빌 에반스는 끝없이 그녀의 죽음을 곱씹은 것은 아닐까.


B Minor Waltz(For Ellaine)



그에 이어지는 곡은 <You Must Believe In Spring>이다. 그가 쓴 곡이라고 해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어질 만큼 너무도 빌 에반스다운데, 정작 작곡자는 <I Will Wait For You>로 유명한 프랑스 작곡가 미셸 르그랑이다. '봄을 믿어야만 해, 반드시' 하고 말하는 제목은 제법 시적인데, 겨울을 지나는 이의 고통이 담겨있다. 봄이 올 것이라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믿어야만 한다고 되뇌인다. 이 길고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 겨울에는 끝이 있을까 하고 묻는 이의 연주다.


You Must Believe In Spring (M. LeGrand)



[We Will Meet Again]이란 음반은 해리 에반스에게 헌정된 음반이고, 그 음반의 첫 곡 <Comrad Conrad> 역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의 친구 콘래드 멘덴홀에게 헌정된 곡이다. 지금의 재즈 뮤지션들에게야 익숙한 코드 진행을 열두 키로 돌리면서 4/4박자와 3/4박자를 오가는 연습곡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Comrad Conrad (B. Evans)



'역사상 가장 오랜 자살'이라고 불리는 그 자신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극의 그림자는 젊고 빛나던 청년 빌 에반스의 영혼에 이미 드리워 있었으며, 그는 의식조차 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 그 어둠에 잠식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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