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bie Hancock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퓨전 재즈의 시기는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옛날 얘기라, 책에서 접하게 되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이나 인터뷰에서 언급되는 내용으로 적당히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1960년대 말이면 이미 비틀즈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뒤 몇 년이고, 지미 헨드릭스가 기타에 라이터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던 것도 다 경험한 뒤다. 재즈의 중심부에서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시작으로 전자악기를 받아들였고, 그의 사이드맨들이 하나하나 자신의 밴드를 만들어 독립해 나갈 때 선택한 스타일은 십중팔구 퓨전 재즈였다. 존 맥러플린, 조 자비눌과 웨인 쇼터, 칙 코리아, 토니 윌리엄스 등 말이다.
허비 행콕은 펜더 로즈라는 일렉트릭 피아노를 그저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일스가 연주하라고 시킨 덕분에 그 악기와 만나게 되었다. 마지못해 손을 대자 그 악기가 가진 부드러운 음색에 바로 매료되었고, 그 소리와 함께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경로로 전자 악기를 발견했을 것이다. 평생 호기심 많은 성격이었으니까.
당시에는 퓨전 재즈가 그저 돈벌이를 위한 변절처럼 느껴졌던 이들도 제법 많았던 모양인데, 뭐 이해가 가는 면도 있다. 1960년대까지의 재즈는 점점 즉흥연주를 극대화해 가면서 복잡하고 난해해져 갔다. 좋게 말하자면 재즈는 대중음악에서 예술적인 감상을 요구하는 음악으로 꾸준히 진화해가고 있었는데, 퓨전 시대가 되면서 재즈가 갑자기 대중음악이 가지고 있던 단순함과 끝없는 반복을 받아들였다. 이런 움직임을 퇴행이나 변절로 여기는 사람들(골수 재즈 팬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허비 행콕의 초창기 퓨전 밴드인 Mwandish의 음악을 들으면 그런 비판 섞인 눈초리가 터무니없이 들릴 지경이다. 전자 키보드가 사운드를 크게 바꿨고, 드럼을 연주하는 방식이 전통적인 스윙에서 벗어나 제법 변했지만 꽤나 아방가르드한 느낌이 가득하다. 이전 시대의 재즈의 유산을 떠안은 채 새로운 소리를 모색하는 것이 역력한데, 당연한 얘기일지는 모르나 상업적으로는 실패에 가까웠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허비 행콕은 밴드를 해체했다.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들으면 그다지 난해하게 들리지도 않고, 충분히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이다. 재즈는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아주 먼 길을 걸어왔으니까.
악기가 가진 음색이 연주자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접근을 어떻게 바꾸게 되는가를 생각할 때, 나는 종종 허비 행콕의 연주를 찾아 듣는다. 허비 행콕은 재즈 피아노의 화신 같은 존재인데, 사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곁에서 끊임없이 음악을 들려준 탓에 오히려 평가절하된 느낌이다. 그런 질문을 받지 않기를 바라지만, "키쓰 자렛과 허비 행콕, 둘이 물에 빠졌다면 당신은 누구를 구하겠어요?" 하는 물음에 아주 힘겹게 "아마도 허비 행콕이겠지."라고 대답했다던 분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당시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평가절하의 이유를 또 찾자면, 퓨전 재즈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다 못해 대중음악의 중심에 서 버린 것, 그래서 예술적인 재즈를 떠나 상업적인 음악을 한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비판적인 시선이 제법 영향력을 가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누가 뭐래도 <Rockit>은 혁신적이었는데, 더 이상 재즈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 음악이었으니까.
썸네일에는 허비 행콕의 얼굴이 바로 드러나 있지만, 사실 <Rockit>의 뮤직 비디오에는 허비 행콕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MTV가 등장하며 음악 시장에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오던 시절, 흑인 아티스트의 얼굴이 MTV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허비 행콕은 자신의 얼굴이 전면에 드러나면 MTV에 노출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전략적인 선택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둔 트랙이 되었는데, 그 성공의 뒷면에는 끊임없는 재즈 커뮤니티의 비판이 있었다. 재즈 피아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재즈를 버린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로부터도 사오십 년이 지났고, 그런 감정적인 반응을 다 내려놓은 지 오래다. 사실 재즈를 듣고 애정을 쏟는 이는 한 줌에 불과한 시대가 되었다. 서브 컬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음악에 홀려버린 오타쿠들이 있는, 그런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조금 더 이런 음악에 대해 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퓨전 재즈 말이다.
다시 1973년의 허비 행콕으로 돌아와서 헤드 헌터스와 그 대표곡 <Chameleon>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한다. 코드 두 개가 무한히 반복되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곡이다(허비 행콕의 펜더 로즈 솔로 부분에서는 코드를 다르게 연주하기는 한다). 끝없이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듯 하는 이전 시대의 재즈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 곡이 두 개의 코드 위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처럼 들릴 것이고, '역시나 재즈가 가진 혁신은 다 저버리고 그냥 대중의 취향에 영합해 버렸군' 하고 삐딱한 시선으로 내칠만하다. 하지만 허비 행콕의 <Maiden Voyage>는 어떤 음악이었나? 어디로 진행하지 않고 그냥 머물러 있는 몇 개의 sus4코드가 전부인 곡을 듣고는 '모달 재즈'라며 받아들였던 게 얼마 전이었다. 그렇다면 전자 악기의 소리와 백비트가 일정하게 들리는 것에서 다른 장르를 더 떠올린 탓일 것이다.
별의별 음악을 다 듣고 난 2025년에 이 곡을 들으면 오히려 중립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두 코드 위에 한 번은 클라비넷으로, 한 번은 펜더 로즈로 연주하는 허비 행콕의 솔로를 들으면 경이롭기 그지없다. 솔로를 접근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두 명의 연주자를 듣는 기분이 들 정도인데, 이건 허비 행콕이 가진 음악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즈에는 악기를 불문하고 통용되는 공통적인 자산 같은 프레이즈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악기의 음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다시 말하면 그 악기의 음색을 전제로 한 프레이즈도 존재한다. 허비 행콕은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음색을 만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이전에 그 누구도 이런 표현을 해 낸 사람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듣고 따라 하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리에 반응하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이 모든 것을 개척해 나갔다. 그런데 그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지금껏 후대의 음악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서기 어려운 경지를 그냥 달성해 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