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사회라는 소설이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자꾸 술을 권한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달픈 세상이 술을 마시게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 아니면 말고. 일요일 밤이면 늘 술 권하는 사회라는 생각을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골목 한 귀퉁이에 있는 편의점의 불빛이 유독 그를 불러들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만큼 일요일 밤의 연주는 힘든 일이었다.
편의점의 한 칸을 가득 메운 맥주캔들은 제법 다양한 국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국산 맥주들이 다수였지만 버드와이저나 밀러와 같은 미국산, 하이네켄은 홀랜드-홀랜드가 네덜란드였지-, 그리고 일본산인 아사히나 기린 등등. 좀 있으면 도스 에끼스나 포스터스 따위도 진열될지 모를 일이다. 가만, 포스터스는 있었던가?
아사히 두 캔을 집어 들었다. 하나는 약간 아쉽고 둘은 살짝 과하다. 그러니 두개를 집어들 수밖에. 값은 오천 원. 사람들과 어울릴 때를 생각하면 싼 가격이고 그냥 무심히 잠드는 것에 비하면 비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몇만 원의 현금을 받아 든 다음이라 그 정도의 지출은 쉽게 느껴진다.
식탁 위에 투명한 유리컵을 놓고 아사히를 한 잔 가득 따랐다. 투명한 유리컵은 무언가 그의 기분을 좋게 하는 힘이 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강아지 그림이 가득한 유리컵을 써왔는데, 아무런 무늬가 없고 얄팍한 느낌이 드는 유리컵이 마음에 든다.
그러고 보면 유독 설거지할 때 컵들을 아끼는 편이다. 다른 식기들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는 코렐이거나 아니면 깨져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을듯한 것들을 쓰지만 컵들은 다르다. 하나씩 둘씩 어디에서의 기억을 담고 있다. MoMA에서, 혹은 Guggenheim에서 하는 식으로 말이다.
유리컵에는 아사히가 한 7/8 정도 담겼다. 맥주잔으로 쓰기에 딱 좋은 크기이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을 때에는 밋밋한데, 맥주가 담겨지고 나니 예쁜 모습이 되었다. 물어보았다.
“이게 무슨 색이야?”
“앰버.”
“밀러는 이것보다 훨씬 연한 색 아니었나?”
“맞아.”
“근데, 앰버가 도대체 우리말로는 어떤 색이지?”
“호박색.”
그 호박색이란 색깔이 호박이라고 부르는 보석의 색깔에서 기인한 건지 아니면 신데렐라의 마차 색깔인지 모른다. 어쩌면 호박이란 보석이 그런 보석답지 않은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아마도 호박과 같은 색깔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좀체 색깔을 구별하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증상을 적록색약이라고 불러왔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그렇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오늘 나 뭐 달라진 것 없어? 하며 물어보는 애인만 없다면 충분히 순조로운 인생이다.
밀러의 색깔을 떠올렸다. 물론 무슨 색깔인지 그 이름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저 아사히의 빛깔, 앰버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밀러의 색깔은 그의 눈을 통해서도 다르게 보였다. 그 색깔은 혼란스럽던 스물 언저리의 그때를 기억나게 하지 않던가. 투명하고 목이 긴 유리병에 담겨있던 밀러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왕가위와 함께 1990년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에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행은 지나고 또 지나 이젠 그 누가 밀러를 마실까 싶긴 하지만 -그러고 보면 헤이즐넛 커피도 마찬가지 아닌가-, 다행히도 하루키를 읽는 것은 그렇게까지 올드 패션드하지 않은 듯 하다.
그렇다면 요즘 왕가위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90년대에 이십 대를 보낸 그들의 마음을 휘청거리는 화면으로 한껏 뒤흔들어놓고서는.
왕가위 얘기를 하자니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 왕가위 영화는 스무 살 때 기억도 나고 해서 디비디로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는 아무리 봐도 이해도 기억도 잘 못하는 편이라, 해마다 가을 타고 그러면 봤던 영화를 보고 또 본답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막문위라고 읽는 홍콩의 가수 카렌 목(Karen Mok)의 음반을 녹음하러 일주일 넘게 상하이에 간 적이 있었어요. 근데 카렌이 무슨 얘기하다가 자기가 왕가위 영화에 나왔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더군요. 나중에 검색해보고야 알았죠. 아 그 노랑머리 여자.... 하면서. 가만, 노란색이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