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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주

by 최은창



어떻게 해서 그의 눈이 밝아졌는지 그도 알지 못했다. 그저 어느 날 자고 깬 뒤 물을 마시려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밑도 끝도 없는 극심한 공포를 느낀 것이었다. 숨이 가빠지고 온몸에 한기와 더운 기운이 동시에 올라왔다. 식은땀이 났다. 목 안에 가래가 낀 것처럼 불쾌하고 답답한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아니, 구체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기보다는 죽는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일일까, 언젠가는 맞이하고 말 그 죽음의 순간에 나는 얼마나 두려울까, 혹시 이런 종류의 기분일까 하는 생각들이 순식간에 휙휙 지나가는 중이었다. 휘청이며 부엌으로 걸어가 찬물을 석 잔이나 연거푸 들이켰다. 창문을 열어 찬 공기를 쐬었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이 없어 신발을 꿰어 차고 집 밖으로 나갔다. 죽어가는 순간의 기분이란 이런 걸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공황 장애일 것이다. 가벼운 공황 장애 증상은 늘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치과에서건 마사지를 받을 때건 눈을 가리는 수건을 덮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었다. 웬만하면 계단을 걷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다 그런 기억 때문이었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 강도가 높았다는 것만 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제로 그의 몸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고야 말았다. 그러고 보면 공황 장애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이후, 때때로 가느다란 전선 가닥이 보이는 듯했다. 투명하다고 해야 할지, 반투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아마도 그 중간쯤 되어 보이는 가느다란 전선. 반짝, 하고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지나가던 몇몇의 사람들, 소수에게서만 보이는 전선. 그 전선 안쪽으로는 희미한 빛 덩어리가 아주 자그마하게 형체를 가진 채 천천히 그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워낙에 가느다란 전선이었다. 그저 희끄무레한 작은 점들의 연속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정도였다. 햇빛의 각도가 바뀌어야 선명히 보이는 거미줄처럼.


처음 그 전선 가닥을 그의 몸에서 발견하게 되고는 지독한 혼란에 빠지고야 말았다. 어떻게 지금껏 내 몸에 이런 게 붙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평생을 살아올 수가 있었단 말인가? 왜 느끼지 못했으며 그렇다면 옷은 또 어떻게 뚫고 지나간단 말인가? 그러나 그 투명에 가까운 전선 가닥은 실재하는 것이었다. 손으로 조심스레 잡아서 한쪽 끝을 당겨볼 수도 있었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끌려 이쪽으로 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늘어나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의 등에 붙어있는 쪽을 당겨봐도 마찬가지였다. 살갗이 당겨지는 느낌 따위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선을 한 바퀴 휘감은 손은 미세하나마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실재한다.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어떤 목적을 가진 장치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실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조차 부인할 수는 없다. 그는 이제 이 존재를 받아들인다.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이 전선의 존재를 인정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목적인가 아니면 수단인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의미가 있는가? 알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불현듯 그의 삶에 등장한, 아니 그가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전선 가닥은 그로선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이 전선은 존재한다. 이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전선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 전선은 -전선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전기나 그와 같은 어떤 에너지를 전달하는 통로일 것이다. 나의 몸으로 에너지가 공급되고 있거나 혹은 내게서 에너지를 전달받는 그 어떤 존재가 저쪽 끝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선이 그 어떤 의미도 담지 않고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라면, 그렇다면 왜 갑자기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 것일까? 그것도 극심한 죽음의 공포를 겪은 뒤에야.


그는 전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무언가 나에게 알려주려는 것이 있을 테지, 아직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었을까- 내가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분명 거기 있을 텐데 왜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걸까, 하던 궁금증도 두어 주가 지나자 일상의 번잡함 속에 점차 사라져갔다.


몇 주 만에 다시 전선이 눈에 들어왔다. 완벽한 투명에서 약간 희끄무레한 색깔이 섞여 들면서 전선의 모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희뿌연 작은 점들이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얼마간 흰 점들의 행렬이 지속되다가 새로운 점이 형성되기를 멈추고는 점점 멀어져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점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되어 전선은 희끄무레하던 색깔이 다시 옅어지면서 투명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없어져 버렸다. 사실 그동안 몇 차례나 전선은 그 모습을 드러냈었을 수 있다. 때마침 그가 뒤를 돌아다 보지 않는다면 놓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매일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왜 지금은 전선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


곰곰이 돌이켜 보았다. 시간은 오후 두 시가 좀 넘은 때였다. 혼자 있는 방 안이었다. 반쯤 읽은 소설책을 끝내려는 심산으로 커피 한잔을 끓여 식탁 앞에 두고 책을 펼친 지 한 삼십 분 정도 지났다. 랜덤 플레이되고 있던 아이튠즈의 음악 목록이 라벨의 곡을 선곡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점점 그 곡에 빨려 들게 되어 더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읽던 책을 덮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고 선 채 한동안 음악을 듣고 있었다. 볼륨을 조금 더 올렸다. 그도 모르게 이마를 살짝 찌푸리고 있을 만큼 집중의 정도가 좀 더 높았다. 시간이 좀 느슨하게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 말고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양말을 신고 있는가 아닌지가 전선의 발현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식탁도, 커피도, 소설도, 라벨도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전선이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두 달 뒤였다. 제법 그럴듯한 연주를 하는 중이었다. 그와 함께 연주하는 세 명 역시 제법 훌륭한 연주자들이었다. 그들이 좋은 무대에서 집중해서 연주하는 순간이라면 꽤 괜찮은 음악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의 왼편에서 드러머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르게 들릴 만큼 창의적인 프레이즈를 구사하고 있었고, 그것에 자극받은 색소폰 연주자 역시 훨씬 자유로운 솔로를 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끊임없이 화성을 바꿔가며 컴핑하고 있었다. 한동안 두 눈을 꼭 감은 채 오로지 청각에 그의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연주하던 중 그 존재가 느껴졌다. 그것은 과거에는 찌릿하게 가볍게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이전이라면 음악적인 카타르시스라고 이름 붙였을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는 희끄무레한 전선의 존재였다. 눈을 뜨자 몇 가닥의 전선이 보였다. 드러머에게, 그리고 색소폰 연주자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연결된 전선. 그리고 그 안에서 촘촘히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흰 덩어리의 점들. 그리고 이내 다시 투명해지고 마는 그 실 같은 가닥들.


그 투명에 가까운 전선이 그에게 말해준 것은 바로 그의 존재 이유였다. 숙주 - 타자를 위해 에너지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것이 생의 유일한 목적인 존재. 오랜 시간을 거쳐 그가 파악해낸 자신의 본질이자 존재 이유란 그러했다.


뮤즈는, 혹은 음악 그 자체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수없이 많은 숙주의 일생이 필요했다.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맞물려있는 어둠 속의 공장, 그곳에 연결된 채 전 세계로 뻗어 나간 가느다란 전선의 끝에는 그와 같은 존재들이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발씩, 한 발씩 힘겨운 걸음을 걸어 몇 볼트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 고행과도 같은 삶이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믿으며.


숙주의 눈에는 전선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한, 그러나 몸 어디에도 전선을 붙이지 않은 존재들이 섞여 있다. 그들 역시 한 발씩, 한 발씩 앞으로 걷는다. 걸음은 눈에 띄게 가볍다. 그들은 뮤즈가 숙주에게서 긁어모은 에너지를 뭉쳐 만들어낸 심장을 달고 있다. 가끔씩 그들은 세상이 경험하지 못한 성취를 이루어내기도 한다. 그 심장이 퍼부어내는 에너지가 종종 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 심장이 담고 있는 에너지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 몸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숙주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전선이 보이는 것일까? 숙주로서의 삶을 직시하는 것은 구원인가? 나는……그때 이미 죽은 것인가? 그 지독한 공포 속에서?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그런 예술가들 말고, 2류 혹은 3류라고 말해야만 할 이들의 삶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요? 스스로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에 이 질문은 제게 큰 의미를 갖습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결론은 제 머릿속에 나와 있습니다. 문명이라고 할지, 예술사라고 할지 모를 그 세계가 유지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2류 예술가들의 몫이라고, 그 에너지를 어떤 허브와도 같은 곳에 축적하는 것 까지가 그들의 역할이라고 말입니다. 허브는 무수히 많은 이들이 생성해낸 에너지를 모아 어떤 이에게 공급해주며, 그 힘을 공급받은 천재적인 누군가는 예술사의 한 장면을 개척하고 만다고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충분히 시간을 들여 소설적인 이야기로 표현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위의 글 <숙주>는 마치 논문의 초록abstract 같군요. 아직 씌여지지 않은 이야기의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