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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Aug 03. 2015

필통을 샀다, 얼마만일까.

  눈 앞 테이블에 멍하니 자리한 필통을 내려보자니 조금은 쓴 맛의 웃음이 나왔다. 고작 저걸 고르겠다고 두 번이나 차를 몰고 핫트랙스에 가서는 그때마다 작은 진열대 앞에 한 시간씩 서서 뒤적였던 걸까 싶어서. 비닐 포장을 뜯고 세개의 값 싼 만년필과 하나의 샤프, 만년필용 카트리지 두 개를 채워 넣고는 하루 숨을 돌리고 나자 필통은 갑자기 실용성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첫날 집어 들었던 조금이나마 장식이 붙어있던 네이비 색 필통을 환불할 때 내 머릿속에는 '보기에는 괜찮아도 매일같이 실제로 쓸 때면 불편할 거야'하는 생각이 한껏 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색깔은 네이비에서 검정-잉크가 묻어도 티가 나지 않을-으로, 아무런 장식 없이 각각의 모서리가 조금 둥글어진 게 전부인 사각형의 필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크기가 조금 더 큰 녀석으로. 충전 케이블이나 USB 저장장치 따위를 챙겨야 할 수도 있으니, 하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아이팟으로만 쓰는 이전 아이폰을 메쉬 포켓에 넣어보았다. 쏙 하고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만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지퍼를 닫고 나자 그야말로 필통 그 자체였다.


  원래는 가죽 필통을 사려고 했었다. 사오 만원 선, 그 정도의 사치는 부릴 만 하다 싶었다. 아니, 나이 마흔이 넘은 이에게 사치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무건 가죽이건, 생명체에서 나와 물건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좋았다. 플라스틱, 금속, 합성섬유가 아닌 것들, 시간이 지나면 형체가 조금 뒤틀리고 모서리가 닳아가고 색이 변하는 것들, 이미 죽은지 오래이나 살아있는 것 같은 그런 것들이라야 마음을 줄 만 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그런 것들은 꼭 비싸다는 것. 나무도 그렇고 가죽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똑같은 두 개는 없다. 그렇다면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기계의 도움을 얼마간 받는다고 하더라도, 가 내 믿음이었고 그 믿음은 헌금과도 같은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소심하다. 고작 사오 만 원이라고 했다. 부들부들하게 손에 잡히는 기분이 좋은 가죽필통은 역사나 사오 만 원 정도인 만년필을 보호해주기엔 턱없이 약해 보였다. 저쪽에 도톰하게 패딩이 대어져 있는 필통이 있다는 것을 안다. 결국은....... 이거나 저거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합성 섬유로 짜여진 필통을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원래의 계획이란 환불을 하고 얼마간의 차액을 얹어 가죽 필통을 사는 것이었는데. 결국 멋대가리 없는 필통을 앞으로도 몇 년 간이고 쓸 모양이다. 지극히 실용적인 저 필통은 제법 오래 버텨줄 것이 분명하다. 손에 쥐어보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심하죠, 저란 사람. 오늘은 이런 저에게 좀 화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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