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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Sep 16. 2015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1.


  역시나, 내게 글쓰기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지금 쓰기 시작하는 이 글이 소설적인 그 어떤 형태를 갖추게 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떠하단 말인가? 나는 그저 이야기하고 싶은 불길이 내 속에서 조금이나마 느껴질 때 더없이 반가워지는 존재다. 그것이 최근 십 년 정도의 시간을 들여 발견해낸 나의 일부이다. 큰 부분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쓰고 싶어 하는가? 다른 한 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나는 이미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꾸준히,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은 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인정하지 못한 채 저편으로 밀쳐놓았던 답. 과연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은 내 마음을 읽어 이렇게도 명료하게 말해주었다.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고.


  나는 부끄러워한다. 이기심의 형태를 가진 욕망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아직 극복되지 않은 것, 그래서 부끄러워한다. 나는 더 큰 사람이어야 했다. 더 잘 난 사람이어야 했다. 보잘것없는 이기심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초연한 존재이고 싶었다. 주목받고 또 존경받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 시선을 느끼지 않고 또 무심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렇지 않은 현재의 나를 부끄러워하고, 현재의 욕망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이기심으로 출발한 조지 오웰의 글들은 얼마나 훌륭한가!


  서른 중반에, 머릿속은 무언가 쓰고 싶다는 욕구와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법 훌륭한 연주를 하는 사람이 휙, 하고 자기의 인생행로를 수정하더니 그만큼 훌륭한 글을 써낸다, 이런 그림을 상상했었다. 그리고 거기에 쏟아지는 가상의 박수갈채에 취해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제법 훌륭한 연주를 하고 있는가? 최소한 내 연주만큼의 가치를 가지는 글을 쓸 수 있는가? 사람들이 읽을 것인가? 손뼉을 칠 것인가? 이 모든 것들이 다 허약한 기반 위에 쌓아 올린 가정이었다.  


  지금 쓰는 것은 자기 성찰이며, 고백이다. 스스로 나의 마음을 찌르는 행위이다. 고통스럽다. 그러나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래, 소설이 되건 에세이가 되건 일기가 되건 상관없다. 모르는 이야기를 공부해 가며 아는 체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나라는 사람은 번뜩이는 재능으로 휘몰아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음악도 글도……. 슬프지만 말이다. 게다가 글만 쓰며 보낼 수도 없고 음악만 할 수도 없으며, 생업도 유지해야 한다. 모르는 타인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 보낼 시간이 없다. 십 대에 경험해야 했을 것을 뒤로 미룬 탓, 이십 대에 해야 했을 일을 나중에 겪는 탓이다.   


  어쩌면 지각, 혹은 늦깎이라는 단어가 내 인생을 휘감는 하나의 경향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늦은 시작, 한 걸음씩 늦게 다가오는 자각과 그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내 인생이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우발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잘했었노라고. 우발적이라 함은, 내 의지 이전에 내게 공부를 잘하는 존재가 이미 덧씌워져 있었음을 말한다. 내가 공부를 잘하고 싶어, 잘하고야  말겠어하고 다짐하기 이전, 이미 공부를 -얼마간- 잘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쯤에서  얼마간,이라고 단단히 새겨 넣고 지나가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천재라도 되는 양 오해할 수도 있을 테니.


  그저 친구가 없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마룻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집에 있는 책을 하나하나 읽어나갔을 뿐이다. 만화책에서 시작해서 결국은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한 백과사전에 이를 때까지. 그 정도면 중학교 정도까지의 교과과정은 큰 노력 없이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다. 친구가 없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니 우발적이라 할 만하다.


  연애도, 음악도, 글도 또래보다 늦게 찾아왔다. 지극히 조심스러운 기질 때문이었으리라. 부모 입장에서는 키우기 쉬운 자식이었을 수 있다. 아니, 이 말은 취소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부모의 삶이 만만하다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극도로 예민하던, 상처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던 날카로운 성격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고 집을 나가고 하는 식의 사고를 겪지 않았을 뿐이지 절대로 키우기 쉬운 자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없었던 이야기로 하자.


  어쩌면 내 안의 불길이 너무 약해서였을 수도 있다. 재능이라고 할까, 그런 것. 걷잡을 수 없으면 자신의 존재를 쥐어 삼켰을 텐데, 잘 길들일 수 있는 정도의 불길, 재능. 그 정도가 내게 허락된 것이었으리라. 작은 불씨였다 해도 잘 달래가며 종이 한 장, 작은 나뭇가지 하나, 이렇게 조심스레 키워갈 수 있었다. 하지만 상처는 남는다. 원래가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다. 힘겹게 걸어간다는 사실이 버겁다.  


  한 호흡 가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움찔, 할 정도로 재능이 넘치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부자는 부자를 알아본다. 하지만 가난한 자도 부자를 알아본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 자본이 자본을 낳고, 재능은 재능을 낳는다. 그들은 그들끼리 모이고 뭉쳐 무언가를 만들어 간다. 아, 내가 가난한 자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이라 느낄 사람들도 많으리라. 쁘띠 부르주아지, 이 정도로 말하면 적당할까? 그러나 예술이란 고도 자본주의 사회는 쁘띠 부르주아지의 몰락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위축되고, 열등감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가는 것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한때는 나도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 봤다는 이야기다. 시선이란 모호한 형태를 띠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에도, 지금도 잘 알고 있다.


  내게 없는, 최소한으로 줄여 표현하더라도 내게는 부족한 재능을 가진 그들, 그들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시선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래서였으리라. 나는 내 이기심을 최대한 작동시킨 것이었으리라. 그들은 글을 쓰지 썩 잘 쓰지는 못할 테니, 글을 쓰는 악사란 주변에 나밖에 없을 것이니. 음악을 하며 글을 쓰는 것이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충분한, 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명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뿐, 이미 마음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드러내기에 부끄러운 나의 모습, 열등감과 이기심.  


  고해성사와도 같은 이 오전의 글과 시간은 과연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가?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고 싶다. 나의 의지…….



2.


  한동안 연주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권태로움’이 아닌, ‘고통’ 말이다. 수백의 젊은 생명이 수장되어 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뒤에는 그 어떤 아름다운 소리조차 무기력하게 들릴 뿐이었다.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지금껏 십 수년을 울고 웃으며 목숨을 걸듯이 매달려 온 일에 과연 조그마한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내 여느 때와 같이 소리를 만들어내는 이들 사이에 둘러싸이고 나서는 고통스러웠다. 이 세상은 내가 편하게 숨쉬기엔 산소의 양이 조금 모자란다. 나는 이 세상과 이질감을 느낀다, 쉽지 않다.


  그렇게 가쁜 숨을 쉬며 한 달 정도 살아남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지금껏 나는 소리에 무엇을 담았는가?


  그저 인생은 고통뿐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더라면, 거봐, 역시 인생은 그런 거지, 하며 제 갈 길을 갈 수 있었을 것만 같았다. 음악이란, 예술이란 그런 인생의 높고 낮은 감정의 움직임을 떠나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라 믿었다면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악이 세상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위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믿었다면 지금이야말로 음악이 가장 필요한 시기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언가 의미를 담아 말하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무기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어떤 말을 하고 있었더라면.


  내가 하고 있었던 이야기는 기껏해야 ‘나를 좀 봐줘, 내가 대단하지는 않아도 그렇게 무시받을 만한 존재는 아니야, 그렇게까지 못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억지로 시선을 붙잡아 놓으려는 가련한 노력이 전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죽음을 맞닥뜨린 순간에 과연 나 하나가 조금 무시당하는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혹은 조금 덜 무시당하는 것이 조금의 차이라도 가져오는가 말이다.


  이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세상에 하려는 이야기가 있는가?







  굳이 브런치북 프로젝트가 아니라도, 내가 책을 낸다면 하는 상상을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만약 조만간 책을 내게 된다면 그 서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 년이 가도록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폐기 처분되거나 하겠죠.


  아,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썼습니다.  글 쓰는 이들의 말투를 사용해 봐야지, 하는 심정으로 썼던 글이라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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