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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by 최은창



허허, 이것 참 큰일이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늘상 오르내리던 산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 들어선 것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 가을 치고는 제법 많이 내린 비에 낙엽이 쏟아지듯 떨어졌고, 길이 축축한 나뭇잎으로 온통 뒤덮여 버린 탓이었다. 나무들은 가지를 거의 다 드러냈고 하늘은 좀 더 많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면 하늘은 언제나 다른 구름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늘 새롭고 늘 낯이 설었어야 했다. 그러나 유독 지금에야 하늘은 처음 보는 광경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앞에도, 뒤에도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겁부터 먹기에는 조금 이른 때였다. 시계를 올려다 보았고 아직 해가 완전히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약간 불안한 정도. 그는 슬슬 걸음을 되돌려 보았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그곳에서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고양이의 장화는 빛이 좀 바래 있었고, 얼마간의 진흙이 묻어있었다. 진흙 위로는 나뭇잎도 두어 개쯤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고양이의 발에 신긴 장화와 그 불그스레한 색깔 조차 생각만큼 그의 시선을 한눈에 끌어 당기지 못했다. 그가 한 십 초간 너는 또 누구냐, 하는 심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본 뒤에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게 되었다. 네 발 모두에 -동화책의 삽화와는 다르게- 장화가 신겨져 있었다. 두발로 서 있었더라면 훨씬 더 놀랍게 받아 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네 발로 서 있는 한,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에는 어느 정도 사실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리곤 누군가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인시큐러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일단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게다가 그 소리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그는 깊은 산에서 길을 잃었고, 주변에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고양이도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고양이는 하늘을, 그는 그 고양이의 네 짝 장화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중이었다.


"인시큐러티".


또 한번 들려왔다. 같은 단어, 그가 모르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 발음은 아주 정확해서 못 알아듣는 와중에도 영어라는 것 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그보다 한 뼘은 키가 크고 눈이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미국 사람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걸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 쯤은 돌아보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것 만큼은 확실해졌군,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확실해진다는 것이 난처한 상황을 썩 낫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누군가가 말을 했고, 그의 눈앞에는 빨간 장화를 네 발에 신은 고양이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나뭇잎을 다 땅바닥에 떨어뜨린 나무들이야 수도 없이 많았고, 그렇게 따지자면 하늘에 구름도 몇 조각 떠 있긴 했다. 나무가 이야기를 걸었다고 해도 똑같이 허황된 이야기였을 테지만, 그다지 의심하지 않고 눈앞의 고양이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고 믿어버렸다.


이번에는 고양이를 좀 더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애완 동물을 키워 본 적이 없었다. 그 고양이가 어떤 종인 지는 고사하고 수컷인지 암컷인지 조차 구별할 길이 없었다. 그저 천천히 시간을 들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발끝은 장화에 가려져 있었지만- 관찰할 뿐이었다. 산 고양이이기에는 무언가 고상한 느낌이 있었다.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처럼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털이 노숙자의 머리카락처럼 서로 엉겨붙어있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상처나 얼룩도 없었다. 집을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어딘가 가까운 곳에 비를 피할 동굴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빛이 바랜 빨간 장화를 신고 있었다. 장화에 시선이 멈출 때마다 그의 생각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언가 또 다른 말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지만 한동안 다른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 번 이쪽을 휙, 하고 돌아보고는 고양이는 슬그머니 걷기 시작했다. 장화를 신었다고는 해도 역시 고양이의 걸음에서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었다.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는 길처럼 보이는 -사실 낙엽에 뒤덮여있어서 확실히 알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쪽을 등지고 걸었다. 그의 시야에서 고양이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작아져 갔다. 과연 따라가야 할 것인가?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기와도 같은 바람이 일었다. 어차피 길이라고 생각되는 흔적을 따라와 봤지만 결국 이렇게 여기까지 오고 말았지. 그래, 두려워 하지만 않는 다면 길을 잃는 것도 나쁘지 않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날 테니까. 자 겁내지 말고 길을 잃어 보자고, Let's get lost.

그렇지만 현실이란 그의 가족이 이틀 뒤에 경찰에 실종 신고를 내고 또 그 이틀 뒤에야 산악 구조대의 도움으로 그를 발견하는 것 이었다. 그다지 깊은 산이 아니었건만 이상하게도 그를 찾아 내는 데에는 적지 않은 대원들의 적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바위에 기대 반쯤 눕다시피 한 그를 일단 발견한 다음에는 구조랄 것도 없었다. 고작 몇십 미터 정도 들것에 실어 나르고 나니 산길이었고, 그로부터 또 몇십 미터 뒤에는 자동차도 다닐 수 있을 만큼 길이 넓어졌다.


허기와 추위 -그 나흘 사이에 또 한차례의 비가 쏟아졌다- 에 지쳐 처참한 몰골이던 그가 제 정신을 찾는 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얀 시트가 깔린 병원 침대에서 한쪽 팔에 링거를 꽂은 채 곤한 잠을 몇 시간쯤 자고 깨어나자 곧 또박또박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 이야기였다. 그의 부인은, 조금만 더 회복되고 나면 빨리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도록 해야겠군,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지?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에는 분명 황당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횡설수설하지는 않았다. 벌써 몇 번째 반복하는 이야기는 사소한 디테일이 포함되거나 빠지거나 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관된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사건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어렵사리 찾아간 동굴 속에서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들 -가족일 것이라고 그는 추측하고 있었다- 에게 도달할 때면, 그는 매번 분명히 고양이들에게 이야기라며 한 문장을 힘주어 두 번 반복하는 것을 되풀이했다. '인시큐러티 킬즈 뮤직, 인시큐러티 킬즈 뮤직'이라고.


Insecurity Kills Music.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음악이란 그 좁은 마음의 공간 속에서 숨이 막혀버리기 마련이야.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확신이 무너져 모든 것이 두렵게 느껴지던 시절에, 오로지 마지막 문장을 주문처럼 되뇌기 위해 썼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