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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May 19. 2015



  송 오브 루나, 적잖은 영어 문장을 읽어온 그에게도 얼마간 생소한 느낌이 있는 이름이었다. 아마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이들이라면 좀처럼 생각해내지 않을 단어의 나열이리라. 달의 노래를 송 오브 더 문, 이렇게 하자니 무언가 느낌이 오지 않아서 문 대신에 루나라는 단어를 집어 넣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버렸다. 가만, 루나가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가 맞긴 한 건가 하는 생각 따위가 그의 머릿속에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제법 스마트한, 그러나 감정적으로 건조하기까지 한 그였다. 루나가 명사라는 것, 게다가 로마 신화를 따르자면 달을 인간화한 여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사전을 뒤적여가며 알아낸 것이 한참 뒤의 일이기는 했다. 



    하나씩 차곡히, 벽을 쌓아 올려

    그대가 보이지 않을 높다란 벽을 쌓아

    그대의 눈빛도, 그대의 웃음도 볼 수 없는

    높다란 벽을 쌓아......



  앤트러사이트라는, 역시나도 만만치 않은 이름을 가진 카페에 끌려 온 것은 순전히 새로 옮긴 직장의 사수 때문이었다. 문화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며 그를 반쯤은 강제로 끌고 온 것이었다. 권력 관계란 그의 일상에 얼마든지 스며들어 있었다. 다만 사소한 모습으로 존재하기에 덜 느껴진다.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나랑 어디 한 번 같이 가지 않을래? 하고 물었을 때 확실한 핑계거리가 없고서야 주저주저하면서도 따라 나설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 나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타인의 의지, 사소한 그러나 일상적인 경험. 그는 그렇게 시큰둥한 심정으로 카페에 자리하고 앉았다. 


  키가 훤칠하고 인상이 좋은 그의 사수는 삼십 대 후반의 나이에 수트를 입은 채로 홍대 거리의 한 구석에 앉아 있어도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 작은 듯한 키에 그저 위 아래의 색깔이 맞을 뿐인 양복차림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앉아 있자니 불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좋은 것이 있었다면 늘 보는 사람들 이외의 누군가를 구경하듯 바라보는 것. 소란스러운 카페에서 마냥 웃고 떠드는 젊은이들을 부러운 심정을 담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에게도 저렇게 밝게 웃던 이십 대 시절이 있었던가. 

 


    하나씩 차곡히, 벽을 무너뜨려

    그대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걸

    막혀오는 숨에 견딜 수가 없어

    애써 쌓아온 벽들을 또다시 무너뜨려......



  매일같이 마주하는 직장 상사와는 고작 카페에 앉았다고 별다른 할 이야기가 생길 리 없었다. 시선은 전화기에 처박아 놓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딱히 보는 것도 아니었다. 전화기란 그저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난감할 때 그 상황을 모면하게 해 주는 대상일 뿐. 


  그다지 집중해서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곡은 조금씩 그의 마음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시작한 노래에 어느새 어쿠스틱 기타가 느슨하게 코드를 울려 대고 있었다. 키가 하나 올라가고 나서야 곡은 그녀의 목소리를 제대로 끌어내고 있었다. 


  애써 외면하기 위해 쌓아 올렸던 벽을 자신의 손으로 다시 무너뜨리고야 마는 심정, 아마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후회하며 똑같은 모양의 벽을 쌓아 올리고야 말 것을 아는,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나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나의 감정. 그도 스물 언저리를 지날 때에는 서툴고 아프게 누군가를 마음에 새겨 넣는 작업을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지워지지 않는 그 이름을 지워내려 애쓰고 또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했었던 것이다. 지워지지 않기에 그저 그 주위에 벽을 둘러 쌓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이름, 그러나 견디지 못하고 한 번씩 무너뜨리고야 말았던 그 마음의 벽. 



      얼마나 더, 반복된 고통 속에 갇혀서

     널 잊어보려고 애를 쓰고

     너를 잊는다는게 갑자기 두려워 널 기억해내는

     바보 같은 내 모습이 한심해 보여도

     그댈 잊는 것 보단 나아서 

     끝이 없는 고통 속을 헤메이는걸 선택해버리는.....



  언젠가는 잊기를 소망했었고 또 언젠가는 잊혀지지 않기를 소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숲과 숲이 모인 세상의 저편 끝까지 달려가 커다란 나무에 뚫린 구멍을 찾아내기를 기도하던 시절, 구멍 속에 그 이름을 수천 번이고 반복해 부르고는 풀이 섞인 진흙더미로 막아버리는 꿈을 되풀이해서 꾸던 시절. 십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만큼 희미해진 그 형상이 갑자기 그에게 밀려 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손에 들고 멍하니 뒤적거리던 전화기에서 시선이 살짝 비껴 가 있었다. 그 옆이라고 초점이 맞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 방향을 향하고 있을 뿐, 뿌옇게 흐려진 시야만 남아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껌뻑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툭, 하고 그의 양복 바지에 기어이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얼마나 더, 반복된 고통 속에 갇혀서

    널 잊어보려고 애를 쓰고

    너를 잊는다는게 갑자기 두려워 널 기억해내는

    바보 같은 내 모습이 한심해 보여도

    그댈 잊는 것 보단 나아서

    끝이 없는 고통 속을 헤메이는 걸 선택해버리는......



  잊는다는 것이 두려워 애써 다시 기억해내는, 잊어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을 듯 해서 끝이 없는 고통 속을 헤메이는 걸 선택해 버리는 것이 그의 선택이었을까. 의지를 꺾어버린 감정의 선택이란 과연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애써 십 년의 시간을 들여 이만큼 흐릿하게 거리를 두고야 만 이름을 끄집어내는 이 노래는 그의 선택이었을까.

 







벽 - 송 오브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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