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포토그래픽 메모리

by 최은창



그녀,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어디에서 만난 사람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약 십 초간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본 뒤에 혹시라도 상대방이 눈치를 챌까 봐 고개를 돌려 책을 뒤적이는 척했다. 그라는 사람은 만난 사람들을 제법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이름이나 직장 따위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보낸 공간이며 광경이 사진처럼 정확하게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런 그에게 상대의 얼굴이 분명히 기억나는데 만난 장소가 배경으로 같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란 좀처럼 없었다. 이번을 제외하고는 그런 일이 언제 있기나 했었나 싶었다.


키는 165센티미터 정도, 머리는 어깨를 조금 덮는 정도의 길이에 구불구불 굵은 컬이 힘이 꽤 빠진 채로 남아 있었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한지 두 달은 지났으리라. 몸에 보기 좋게 맞는 바지를 입고 검은 단화를 신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일 것이다. 체형은 마른 편이었지만 억지로 살을 빼거나 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체질적으로 군살이 별로 없는 것일 테다. 이십 대에야 다들 억지로라도 살을 빼고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하겠지만 그로부터 십 년쯤 지나면 그런 몸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기가 쉽지 않다. 각자의 삶의 무게가 제법 무거워져 있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신진대사의 변화가 생긴다. 이전과 같은 열량을 섭취해도 몸에서 기본적으로 소비해내는 열량이 감소하니 체형이 조금씩 무너진다. 나잇살 이라고들 하는 군살이 몸의 곳곳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이를 거스르려면 제법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신체 관리에 투자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좋은 몸매를 유지하는 종류의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그 몸매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여자건 남자건. 살짝 지나친 자신감이 옷을 골라 입는 스타일이며 걸음걸이에서 툭툭 튀어나온다.


그에 비해 그녀는 무언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도 그렇고, 조금 가라앉은 표정에 책을 고르느라 한두 걸음 옮기는 걸음걸이도 차분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왼손에 들고 있는 희고 작은 비닐 봉투에 시선이 가 닿았다. 핫 트랙스라고 적힌 비닐 봉투 안에는 포장도 뜯지 않았을 두어 장의 시디가 들어있는 듯했다. 그녀는 아직도 (1) 음반 매장에 직접 들러 (2) 시디를 사는 희귀한 종류의 사람인 것이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드디어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삼 년 전의 광경이다.


그녀는 조금만 특이한 관객이었다. 밤 아홉 시 반쯤, 잰걸음으로 혼자 재즈 클럽에 들어왔었다. 다행히도 -입장에 따라서는 다행이 아닐 수도 있다- 일요일 밤의 재즈 클럽은 평소보다 한산했고, 그녀는 무난히 맨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무대 위에서 그는 여느 때와 같은 연주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뜯어보자면 호감이 가는 종류의 인상이지, 한눈에 시선을 끄는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혼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동행이 찾아오곤 했다. 무슨 일이지 하며 눈여겨 볼만큼 낯선 광경은 아니란 말이다. 열 시가 되어 첫 번째 무대가 끝나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러 내려올 때까지 그는 그녀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했었다.


십오 분 정도, 짧은 휴식을 마치고 무대 위에 다시 오르자 그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녀는 혼자였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 무대가 끝날 때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전화기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테이블에 두 팔꿈치를 올리고 양손을 깍지 낀 채, 얼굴을 그 두 손에 살며시 기댄 채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에는 무대와 테이블 사이에 놓인 거리가 그녀에겐 너무 좁았다. 서로의 시선이 불편할 만한 거리. 조심스레 고개를 살짝 들어 흘끔, 무대 위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음악을 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아이스티로 보이는 음료 잔 하나와 머그컵 하나가 놓여있었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딱히 주문할 것이 없어 아이스티를 시켜놓고 마시다 보니 몸에 한기가 느껴진 모양이었다. 머그컵에 따뜻한 물 한 잔을 얻어다가 한 모금씩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는 실연당한 사람이겠거니 했었다. 아무 말없이, 때때로 많은 생각에 잠긴 듯이 고요한 표정으로 혼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면 여러 가지의 생각이 떠오를 만도 했는데, 그의 머릿속에서는 유독 실연이라는 진부한 상상외에는 가능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무대 위의 그가 살펴보는 동안, 대단한 슬픔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흔적은 없었다. 빠른 스윙 곡을 연주할 때나 발라드를 연주할 때에나 감정의 기복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야말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음악이 듣고 싶어서 이곳을 찾은 것이었으리라. 갑자기 늦은 시간에 음악이 듣고 싶어서 적당히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지만, 연주는 삼십 분쯤 이미 흘러가고 난 뒤. 그것이 아쉬워서라도, 그녀는 더욱더 집중하여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눈을 감은 채로, 박수조차 치지 않으면서. 그래서 그의 눈에 얼마간 인상 깊게 남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서로 단 한마디의 말도, 아니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사이이기에 기억해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여기까지 떠오르고 나니, 그는 이제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무어라고 첫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떻게 자기소개를 해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말을 걸어야 한다, 다가가서 무어라고 말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뿐.





매거진의 이전글밤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