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 Evans [We Will Meet Again]
그래도 제목인데, 하면서 오역을 안타까워했던 책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가 바로 그 책이다. <It Don't Mean A Thing(If It Ain't Got That Swing)>이라는 듀크 엘링턴의 곡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일 테니 말이다. 음악이 스윙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가사로 가득한, 가히 스윙에 대한 찬가라고 할 만한 곡이다. '.... 출판사에서는 무엇이 조건절인지 잘못 이해했던 모양이군, 쯧쯧. 하루키 책을 그렇게 많이 번역해 온 출판사에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믿기 어렵네, 도대체 아무도 이걸 바로잡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나?...' 하는 생각에 결국 이 책을 사지는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히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아차, 이런 실수를 하다니 말도 안 돼, 하면서 책을 거둬들인 것이었을 것이다.
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던 내가 틀렸다. 세상에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보았다. [意味がなければ スイング はない], 원서의 이미지를 찾는 건 손쉬운 일이라 이내 일본어 제목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지만, '의미'라는 단어가 문장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것 정도는 보인다. '어라, 진짜로 의미가 없다면.... 일 수도 있겠는데' 하면서 번역기에 문장을 집어넣어 보니 역시나였다. 이미가 나케레바 스인구아 나이,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영문 제목으로도 [It Ain't Got that Swing (If It Don't Mean a Thing)]이다.
입 밖으로 내거나 글로 쓰지는 않았어도 나 혼자 오랫동안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라 제법 부끄러워졌다. 뭘 그 정도 가지고 부끄러워할 것 까지야 싶겠지만 마음속에 있던 우월감을 다시 대면한 것이다. 뿌리 깊은 우월감은 조금만 방심하면 쑥쑥 자라난다.
바로 인터넷 중고서점을 통해 주문했다. 그렇게 작은 면죄부를 사고는 한숨 돌렸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루 지나 주문 취소 문자가 왔고 혹시나 하고 잠깐 둘러보니 개정판이 여러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역시나 멀쩡한 책을 거둬들일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만 맞고 세상 사람들 모두 잘못 알고 있는 것보다는 나 혼자 틀리는 게 훨씬 낫다. 딱 한 사람의 생각만 바로잡으면 되니까 차라리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하루키는 이렇게 문장의 앞뒤를 뒤집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기는 했을까? 만약 의미가 없다면? 말장난을 하고 싶어지는 제목이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재즈 에세이로는 [재즈의 초상]이라는 책도 있다. 이 책 또한 [Portrait In Jazz], 빌 에반스의 그 음반 제목을 가져다 쓴 게 분명한데, 이쯤 하면 에세이집 제목은 무언가를 패러디하듯 하는 걸 컨셉으로 삼은 건가 싶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영어로 된 원제는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를 빌려다가 적당히 바꿨으니까.
어쨌건 음반 제목만 떠올려도 머릿속에는 수록곡들이 지나가기 시작한다. 기억은 <Come Rain Or Come Shine>으로 시작해 이내 <Autumn Leaves>로 향한다. 이쯤이면 나도 모르게 음악을 재생하게 되고, 수없이 들어 다 아는 소리의 연속인데도 감탄하며 또 감동하며 듣기를 계속한다. 다 알 것 같은 음악을 들으며 새로 발견하는 건 그동안 달라진 나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책은 와다 마코토라는 분의 일러스트를 보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한 음악 이야기를 펼쳐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머가 넘치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초상화가 스무 장 넘게 그려져 있으니 책 제목으로도 제법 적절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경우에 [Portait's' In Jazz] 하고 복수형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음악, 특히 재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자주 놀란다. 음악인이나 음반, 역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을 평생에 걸쳐 쌓아 온 모양이라 재즈를 제법 깊이 접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도 새로운 내용을 꽤 많이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감상을 슬쩍 풀어내는 재주도 뛰어난데, 그거야 세계적인 작가이니 당연한 일이다. 축구선수는 공을 잘 차고, 작가는 글을 잘 쓴다.
그의 글에는 '재즈란 말이죠, 엣헴' 하면서 살짝 내려다보는 시선 따위는 없다. 연주자나 곡에 얽힌 정보를 적지 않게 나열하기도 하지만, 지식이 없다고 해도 음악을 듣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아마도 그가 재즈를 그 무엇도 아닌 음악 자체로 온 가슴을 열어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독자가 읽으면서 불편해질 여지가 거의 없는데, 이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굳이 걸리적하는 부분을 찾자면 역시 키쓰 자렛과 존 콜트레인을 스치듯 언급하는 부분이다. 무슨 이유에서건, 그 둘의 음악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충분히 설득해내지 못한 것 같다. 음악 표면에 흐르는 감정이 너무 과하다고 느낀 걸까? 그는 조금 더 담백하거나 투박한 재즈에 마음을 주는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키쓰 자렛이나 존 콜트레인의 음악이라도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 정도를 얻었으니 조금 힘이 나기도 한다. 이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가끔씩 그가 쓴 문장 중에서도 '아니 어떻게 이렇게....'하고 감동하게 하는 특별한 부분을 만나게 된다. 재즈 연주자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이 음악의 본질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어 꿰뚫어 보게 된 것일까 하면서. 예를 들자면 빌 에반스 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
".... 인간의 자아가(그것도 제법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자아가) 재능이라는 여과장치를 통과하면서 희귀한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 지상으로 똑똑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빌 에반스의 대표곡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Waltz For Debby>가 아닐까? 아니면 마일스 데이비스가 슬쩍 훔쳐간 <Blue In Green>이 생각난다. <Nardis>는 연주자들이 아직까지도 즐겨 연주하는 곡이다. 물론 최근 몇 년 동안 내게는 <Turn Out The Stars>가 부동의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긴 하다. 그보다 조금 전에는 <We Will Meet Again>이나 <B Minor Waltz> 같이 더 심플한 곡이 마음에 와닿았었다. <Very Early>, <Peace Piece> 같은 곡은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던 기억이고 열두 키를 옮겨 다니며 솔로 하는 <Comrad Conrad>는 오래전에 연습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졌었다.
아니면 <My Foolish Heart>나 <You Must Believe In Spring>, 혹은 그 유명한 <Autumn Leaves> 일 수도 있다. 거슈윈의 <I Loves You, Porgy>이건 번스타인의 곡 <Some Other Time>이건 상관없다. 다른 사람이 쓴 곡이 그의 손을 거치면 어느새 그의 곡인 것처럼 들린다. 수많은 스탠더드 곡들이 빌 에반스의 재능을 통과하면서 반짝이는 빛을 새로 얻는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음반을 낼 때가 됐는데, 이번에는 이 곡을 한 번 편곡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Bill's Hit Tune>, 빌 에반스는 이 곡이 자신의 히트곡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1979년에 처음 발표한 곡이라고 하니 그의 비극적인 인생 끄트머리에 있는 곡이다(그는 1980년에 세상을 떠났다). 1979년이면 그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를 녹음한 것으로부터 이십 년이 지나간 뒤다. 그동안 비틀즈의 모든 음반이 지나갔고 지미 헨드릭스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전이 있었고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이 있었다. 스티비 원더는 [Talking Book], [Innervisions]를 거쳐 [Songs In The Key Of Life]로 이어지는 명작을 쏟아냈다.
시대가 많이도 변했고 재즈는 점차 그 위상을 잃어간 지 오래되었다. 빌 에반스 자신도 재즈와 함께 병약해졌다. 어쩌면 자신에게 남아있는 날조차 몇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빌의 히트곡>이라는 제목은 자조이거나 아이러니가 섞여든 유머였던 모양이다. 제목을 붙이면서 피식, 하고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이 제목대로 빌 에반스의 대표곡이 되었다고 해도 조금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래리 슈나이더의 소프라노 색소폰과 탐 하렐의 트럼펫이 심플하지만 효과적으로 화성을 쌓아 멜로디를 연주한다. 그들의 음색은 더할 나위 없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워서 이 곡과 빌 에반스의 연주에 너무도 잘 스며든다. 색소폰은 예의 더블타임 필로 가득한 음표를 연주한다. 래리 슈나이더, 이름은 낯이 익는데 이 곡 말고는 딱히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연주자이다. 하지만 그건 내 음악 감상의 경로와 그의 연주가 만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상자로서의 나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확실한 감동을 다시 반복하는 것을 선택하는 편이다. 젊은 시절에는 끝없이 새로운 음악을 찾아 헤매었다. 이제는 같은 음악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어쨌건 빌 에반스의 일생을 쫓다가 그의 연주를 만나게 되었고, 예상 밖으로 훌륭한 연주에 살짝 놀라기까지 했다.
그걸 이어받는 트럼펫 솔로는 한결 여유롭지만, 아름다운 멜로디의 연속이라 조금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감정이 쌓여간다고 할까. 사실 탐 하렐은 늘 그랬다. 역시 빌 에반스의 곡인 <Comrad Conrad>를 통해 예전부터 탐 하렐의 연주를 들어왔었다. 심플하다면 심플한 프레이즈들의 연속이다. 그의 솔로를 반복해서 듣다가 제법 구체적으로 뜯어보기까지(거창하게 말하면 분석) 했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대단히 반음계적이지도 않고, 화성적인 기법이 그다지 들어있지도 않은 솔로이다. 그저 멜로디, 멜로디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멜로디가 너무도 설득력이 있으며 멜로디를 담고 있는 음색이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아마도 그 뒤에는 거대한 슬픔 같은 감정이 가득 뭉쳐 있을 것이다.
이 둘의 솔로가 끝나면 빌 에반스가 펜더 로즈, 일렉트릭 피아노를 몰아친다. 분명히 루바토로 연주하는 솔로 피아노 인트로는 피아노였는데, 음악에 끌려가다 보니 언제 악기를 바꾸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빌 에반스는 두말할 나위 없이 위대하지만, 같이 연주하는 이들 역시 듣는 이를 마음껏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컴핑이라고 해도 빌 에반스의 연주에서 관심을 빼앗아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게 만든 거니까.
빌 에반스는 솔로를 시작하는 첫 프레이즈부터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야말로 wail 한다. Wail이란 단어에 울부짖다, 통곡하다는 의미와 바람이 (울부짖듯) 윙윙대다는 뜻이 담겨있는 건 필연적이다. 그가 건반 위에서 wail 하는 동안 펜더 로즈는 그의 격한 터치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계속 찌그러지는 음색을 낸다. 펜더 로즈는 피아노보다 건반 하나하나가 조금 작고 터치도 얼마간 가볍다. 빌 에반스는 평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음표로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다. 초겨울, 제법 매서운 바람이 위잉 하며 소리를 내듯이 빈틈없는 음표의 연속으로 듣는 이를 어떤 구석으로 몰아간다. 그조차도 아름답다.
https://youtu.be/7eV3wd256Yw?si=UpY214izdI8pfwh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