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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창 Sep 30. 2024

대화의 기술


연주하기 전, 대기실에서 며칠 혹은 몇 주 만에 만난 동료들과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오랜 시간 동안 같이 활동해 온 선후배들이라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가끔씩 처음 만나는 사람이 한두 명 끼어 있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다들 친한 멤버들인데 저만 처음 같이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조금 어색한 기운이 돕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윗사람들이 적당한 스몰 토크를 해서 그 분위기를 조금 편하게 만들어가곤 했는데, 이제 한참 선배가 되고 나니 그 역할도 쉽지 않은 것이었다는 걸 느낍니다. 물론 각자의 성격 따라 다르겠지만, 대문자 I인 사람이라 저는 특히 그렇습니다. 


대기실에서 그런 시간을 보낸 뒤에는 무대에 올라가서도 뭔가 조심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아무래도 서로 눈치를 보는 거겠죠.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나자마자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요. 연주를 펼쳐가다가 '여기까지 몰아가도 괜찮으려나?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식의 생각이 떠오른다는 건, 그 순간의 음악적 직관을 스스로 회의한다는 의미입니다(물론 세심하게 듣고 서로 조율해 가는 연주는 또 다른 얘기입니다). 그래서 조심조심 선택한 결과는 보통 맥 빠진 듯 식상한 연주로 드러납니다. 서로 적당히 기다리다가 적당히 던지는 인터플레이는 연주자들의 마음에도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제가 만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처음 만난 사람과 끝도 없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스킬을 완벽하게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진심이 다 담긴 듯 미소를 띠며 상대방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그리고는 궁금한 것이 계속 끊이지 않고 떠오르는 듯,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처음 만난 사람끼리도 어색하지 않게 무언가를 풀어내면서 삼십 분이건, 한 시간이건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조금 불편하거나 곤란할 만한 질문은 용케도 피해 갑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기술이 미국 문화권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재즈는 참 지극히도 미국적인 음악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웬만하면 대화를 풀어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일상적으로 체득해 둔 것은, 낯선 재즈 뮤지션들이 만나 연주를 통해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매우 유사합니다. 별 것 없는 스몰 토크를 이어가면서 서로를 탐색하는 것이나, 짤막한 프레이즈를 하나 던지고는 리듬 섹션의 반응을 살피는 것은 거의 같다고 해야 할 겁니다. 상대의 대답을 듣다가 적당히 follow up question을 던집니다. 실제로 궁금한 것일 수도 있고, 상대가 마음껏 이야기할 만한 주제 안에 머물러 있으려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공감하는 대목을 만나면 크게 맞장구를 칩니다. 


물론 그 친구들이 다음날 만났을 때 어제의 대화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종종 겪은 일입니다. 그들 안에서도 유독 서로 말이 잘 통하는 이들이 있고, 무리에서 주변에 속하는 이들도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문화권이 가진 특징 같은 것은 쉽게 한두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 거겠죠. 미묘한 장단점 같은 게 다 뒤섞여 있습니다. 


저는 이제 만나게 되는 연주자들이 대부분 까마득한 후배들입니다. 학생으로 만나지 않으면 다행인 게,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시작해서 선후배 관계를 거쳐 대등한 동료가 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무리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도, 열몇 살이나 차이가 나고 나면 이미 그들은 저를 모시기 시작합니다. 저와는 적당히 예의를 갖추며 지내고, 자기 또래의 연주자들과 모든 걸 다 열어놓고 연주하는 것이 편할 겁니다. 저로서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저와는 띠동갑도 넘게 나이가 차이 나면서도 연주할 때 대등한 위치로 바로 들어서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바로 직전까지는 선생님, 하면서 깍듯이 대하던 친구가 곡이 시작되자마자 마음껏 자기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할 때 저는 무척 반갑다 못해 고맙기까지 한 기분이 듭니다. 그 후배의 머릿속에서 무엇보다 음악이 가야 하는 방향이 머릿속에 들려오고, 그걸 따라가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결과였겠죠. 그렇게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면, 저도 같이 할 얘기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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