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바꾸기

by 제이비

설거지를 할 때는 휴대폰을 세워놓고 유튜브를 튼다. 알쓸신잡 같은 영상도 좋아하고, 미스터리 얘기를 해주는 썸머썸머 영상도 좋아한다. 영상을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면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는, 설거지가 노동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노동이라고까지 할 만큼 설거지거리가 많지 않지만, 어쨌든 집안일이기에)


둘째는, 죄책감 없이 유튜브 영상을 볼 수 있다.


유튜브를 보는데 왜 죄책감이 드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렇다.

영상을 다 보고 나면 빨리 공부해야 하는데, 책 읽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이 죄책감과 손을 잡는다.


아, 빌드업이 너무 길었다.

설거지를 하고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다가 식탁에 손이 부딪혀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액정에 금이 갔다. 휴대폰 바꿀 때마다 늘 액정을 깨먹는 탓에 항상 보험을 가입했고

2년 사용했으니 이제 바꾸라는 신호인가?라는 긍정적인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의 게으름 때문에 결론은 그냥 금 간 액정을 가진 휴대폰 주인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사용했는데 갑자기 지문인식이 안 됐다. 지문을 대는 부분까지 금이 번졌기 때문이었다.

불편했다. 휴대폰을 열 때마다 핀번호를 눌러야 했고, 삼성페이를 쓸 때마다, 사이트에 로그인할 때마다 쓰던 지문을 쓸 수가 없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삼성전자수리센터를 찾아 시간 예약도 했다.

방문예약을 하는 나 스스로가 야무지다는 생각.

나는 그곳을 방문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멍하니 앉아 기다리지 않겠지 훗


평일 오후 2시라 그런지 사람이 많진 않았다. 예약방문 확인 접수증을 뽑고 기다리니 0000번은 몇 번 창구로 가라는 방송이 나온다. 액정이 나간 연유를 설명하고 견적을 듣고 보험가입이 되어 있으니 필요서류를 챙겨 달라고 했다. 수리는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책을 챙겨 나오지 않았다. 야무진 내가.

휴대폰이 없으면 멍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럴 수 없지.

나는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테이블에 앉아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살펴봤다.

좋은 문장들 몇 개라도 건져가야지.

꽤 집중이 잘 됐던 건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다.

몇 번 지나고서야 내 이름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창구로 갔다.


내 휴대폰은 반으로 갈라져 내장을 들어내고 있었다.

수리기사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액정은 다 고쳤는데 메인보드가 나간 것 같아요.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서.. 혹시 메인보드가 나간 거면 데이터가 다 날아갈 수 있어요..."

잠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메인보드가 왜 나가나요? 휴대폰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는데..."

"아마 떨어질 때 충격인 것 같은데, 이게 메인보드 나사를 풀고 나니깐 그 원인이 발현된 것 같아요"

"나사를 풀기 전에 멀쩡한데, 나사를 풀고 나면 메인보드가 나갈 수가 있나요?"

"드물게 그럴 수 있고, 메인보드는 저희 쪽에서 무상으로 교체해 드릴 수 있는데 데이터는......"

"데이터는 그럼 복구가 안 되는 건가요?"

"데이터 복구 센터 같은 데 가셔서 하셔도 되는데, 개인비용이 들겠죠.... 일단 메인보드를 갈고 나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3-40분 걸려요"


나는 멍하니 노트북이 놓인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리고 Chat GPT를 열고, 방금 상황에 대해 질문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Chat GPT는 어조가 굉장히 단호하게 들렸던 건 내 기분 탓일까.

"메인보드를 무상으로 바꿔준다는 건 수리과정에서 고장이 났다는 가능성이 커"

"사전에 데이터가 초기화될 수 있다는 안내를 받지 않았는데 내가 왜 사비로 고쳐야 하는 거냐고 물어봐"

등의 조언을 받았다.


내 이름을 부른다

난감한 표정으로 수리기사님은 말한다

"현미경으로 살펴봤는데 외부적으로 메인보드의 손상은 찾을 수가 없어서 무엇 때문에 메인보드가 나갔는지 원인을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저 근데 제가 엔지니어가 아니어서 기술적인 부분은 모르지만, 액정에 금이 갔고, 그 외에 휴대폰을 사용할 때 아무 증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메인보드가 나갔다고 하고, 데이터는 복구할 수가 없다고 하시니 당황스럽네요. 저는 제가 왜 사비를 들여서 데이터를 복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고객님이어도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잠시만요. 제가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시간은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런데 화가 나진 않았다. 수리기사님도 난감해하는 표정이었고, 세상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오류들이 많이 존재하니깐. 그게 지금 일어나고 있고.

그냥 흘러나가는 시간이 아까웠고,

전화기에 담긴 내 많은 메모들, 연락처들..

흐르는 물에 쓸려나간 것들을 어떤 웅덩이에서 찾을 수 있을까? 건져낼 수 있을까?


5시가 넘어가고 나는 다시 창구로 불려 갔다. 난감한 표정의 또 다른 분이 수리기사님 옆에 서 계셨다.

"저는 수리 팀장인데 이런 경우는 고객님도 저희 엔지니어도 좀 당황스러운 부분이라서, 일단 휴대폰을 사용하셔야 하니 메인보드는 갈아드렸고, 복구 부분에 대해서는 본사에 연락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건네받은 휴대폰 화면은 처음 구입할 때처럼 울긋불긋한 배경화면에 몇 가지의 앱만 깔려있었다.

팀장님은 삼성계정으로 연결된 메일을 여기 연결해서 복구할 수 있는 걸 같이 해보자고 했다.

나는 구글 이메일을 쓰는데 항상 지문으로 로그인을 했고, 비밀번호는 휴대폰에 따로 메모해 두어서 기억나지 않았다. 비밀번호 찾고 복구하는데만 또 한 시간이 흘렀다.

그때까지 팀장님은 계속 난감한 표정으로 같이 앉아 계셨다.

이제는 내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사진은 구글원에 보관이 되어 있었고, 카톡도 나는 그렇게 중요한 건 없었고, 강의를 녹음한 파일도 다 복구가 되었다.

문제는 내 아이디어 노트, 그리고 연락처.

이 부분은 본사와 논의 후 전화로 알려준다고 하셨고 나는 4시간 30분 만에 수리센터를 탈출했다.


아직 복구 부분은 해결되지 않았다. 어제 팀장님이 전화로 아직 진행 중이니 결과 나오는 대로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이제는 복구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예측하지 못한 일들은 누구에게나 닥치지만(그것이 자이든 타이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써주는 타인의 마음을 느꼈다.


상황은 마음이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울 때 내 마음을 스스로 바꾸기는 참 힘들다.

부정적인 감정들-분노, 슬픔, 원망, 후회들이 내 마음에 장막처럼 덮여있기 때문에.

하지만 타인이 그 장막을 걷어내줄 수 있다.

덮여있는 장막의 모서리를 들춰서 후 입김을 불어 내 마음이 다른 모양으로 변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


장막이 덮여 있는 마음들을 위해

선선히 부는 바람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선선히 부는 바람이 장막의 한 귀퉁이를 열고 모른 척 지나갈 수 있게.











keyword
작가의 이전글큰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