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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 진범 Readen May 09. 2016

조선의 식민과 근대
<근대화의 가능성, 위로부터>

역사 1권 <근대와 식민의 서곡> 2부 위로부터의 개혁

 역사 1권 <근대와 식민의 서곡(김동노) 1부에서는 당시의 사상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아래로부터의(피지배계층으로부터) 근대화로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 모색했다. 이제는 위로부터의(지배계층으로부터) 가능성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이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국가 엘리트에 의한 갑오개혁, 국가 주도에 의한 광무개혁, 그리고 민간 엘리트에 의한 개혁이다. 먼저 갑오개혁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갑오개혁은 최초로 근대국가의 구상을 보인 개혁이다. 갑신정변으로 위기에 몰렸던 개화파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국가 개혁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혁의 성공 가능성을 검토할 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개혁 주체들의 Capacity 즉 능력인데 이러한 Capacity는 다시 역량과 자율성으로 나뉜다.

 갑오개혁자율성 부분부터 검토해 보자. 갑오개혁은 의외로 일정 부분에 있어 자율성이 높았던 개혁이었다. 우선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개혁 요구에 맞닥뜨림에 따라 많은 지원을 약속받았다. 의지에 있어서도 개화파들은 청의 사대주의와 조선의 보수주의를 극복할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이들이 주변부 엘리트였기 때문에 기득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강점도 있었다.

 개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치적으로는 법에 의해서 관직을 등용하는 등의 근대적 관료제를 도입하고, 국가라는 추상적 존재에 권력을 이양하는 등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시도했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건설을 위해 우선 군국기무처를 설치했다. 인사권을 제한하고 궁의 업무만 맡는 궁중과 국가 일을 맡는 부중을 분리했고 일본식 입헌군주제를 시도했다. 궁중의 영역에만 왕이 머물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왕권은 축소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의 중앙집권화가 시도되었다. 조세의 금납화와 도량형 통일하고 화폐제도를 정비하며, 재정부서 역할을 하는 탁지아문을 설치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와 노비제를 해체했다. 제도적으로는 법과 교육제도도 근대식으로 정비하였다.

 이 개혁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한계가 명확했다.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일본에 의존적이었다. 일본은 조선 독립국가 탄생을 통한 자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만 개혁을 지지했다. 정치적으로 보수세력을 지나치게 견제하다 보니 재정과 행정능력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일본 의존적 성격이 강했기에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는 반쪽 자리 자율성이다. 자체적으로 스스로 자원동원에 성공해서 외부 의존적 자율성을 끊어 낼 수 있는 역량이 미진했다. 일본을 지나치게 믿었다 할 수 있다. 갑오개혁 세력은 황폐화된 국가재정을 극복할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당시 면세결의 수준이 전체 과세결의 90%이었으며 조선 전기 170만결에 해당했던 세금이 54만결로 급격하게 줄어 있었다.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개혁을 위한 자원을 스스로 동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개혁세력은 자체적으로 자원을 동원을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전의 조선이 너무나도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갑오개혁을 통해 조세를 단순화하고 전납화하는 등의 합리적인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 조선은 조세를 징수하고 운반하는 것에 대한 비용과 비율이 조세에 비해 너무 컸다. 면세지에서도 세금을 징수하고 세금을 다양화해서 세금을 높이는 시도를 했으나 이는 민중을 더 힘들게만 할 뿐이었다. 일본이 조선 시장에 진출함에 따라 물가가 폭등했으나 억제하지 못했고, 세원 역시 풍부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양전 사업에 실패했다. 관리의 부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체계적으로 조세 부과와 징수가 분리되지 않는 한 일개 군현 단위에서 이서 계급(예를 들면 이방과 같은) 의 부정을 배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다음으로 국가 주도의 개혁이었던 광무개혁에 대해서 검토해보자.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갑오개혁이 실패로 끝난 이후로 일본의 내정간섭은 수순이었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열강의 관심이 증가하고 상호 견제가 뒤따름에 따라 새로운 기회가 생겨났다. 일본의 중국 팽창을 억지하고 중국 내 이권에 관심이 컸던 프랑스와 중국 그리고 이 두 나라를 아시아에 묶어두려던 독일의 이해가 맞물리면서 랴오둥 반도를 다시 중국으로 돌려주는 삼국간섭이 일어났다. 이내 조선에서도 중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미국등이 여러 사업에 대한 독점 권리를 얻기 위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조선과 중국내에서 열강 상호 간의 견제가 극심한 틈을 타 고종은 보수 관료와 함께 광무개혁을 시도한다.

 광무개혁의 기치는 구본신참이다. 기본 체제를 근본에 두지만 새로운 것은 참작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 국왕의 군대 통수권과 재정 관할권 강화에 힘썼는데 이를 위해 의정부제를 복원시켰으며 왕실 소속의 궁내부가 국가 재정을 담당하게 했다. 이 때문에 국가 재정의 중앙집권화는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다. 국가 재정 확대를 위한 양전 사업도 시행했다. 물리적 강제력까지 써가며 지방정부를 동원하고 양지아문과 지계아문 등의 중앙 전담 기관도 만들었다. 토지 가격, 두락과 일경의 표시, 경작인의 표시로 하는 지계를 발행했다. (지계의 발행은 조선이 근대적 토지소유권과 조세제도의 기반을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다.) 이 양전 사업은 1901년의 대규모 가뭄에 의해서 실패하고 만다.

 광무개혁은 상공업 진흥에 힘썼다. 근대적 기술 도입을 위해 유학생을 선발했고, 국가 산하의 기업을 설치했는데 특히 섬유산업에 대한 관심이 컸다. 1899년 이후 매년 30개의 회사를 설립했는데 산업의 발전과 세수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로  적극적으로 자기 기업과 자기 이권을 위해 개입함에 따라 사라지게 된다. 근대화 프로젝트들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전기, 전차, 철도, 기술교육 등도 상당 부분 진전되었으며 과거의 도고 상업 체제는 해체되었다. 내장원이 국가재정개혁을 주도했는데 내장원은 본래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영토를 군주의 사적 영토로 보고 조세를 신민으로부터 걷는 전근대적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광무개혁은 자원동원에 있어서 일정 부분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1896년의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피해를 일정 부분 재정 개혁을 통해 서서히 극복하고 있었다. 1901~1904년간 근대적 인프라 구축을 통해서 예산 규모의 증가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었다. 문제는 국방비 지출의 증가와 행정비였다. 특히 행정비 중 절반을 급료(특히 외국 고문관에 대한 급료)로 지급해야 했다. 더군다나 1905년 이후로 일본이 적극적으로 간섭함에 따라 재정구조가 극단적으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통화 개혁을 통해 자원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보다 과거에 흥선대원군이 명목화폐를 시도했으나 관리의 부정이 증가하고 통화량의 팽창을 제어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로 대실패했다. 이 시기에 은본위제 백동화를 시도했으나 통화의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에 비해서 30% 정도 작아 가치 하락을 유도하는 기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특허권료를 받고 민간 주조를 허락했는데 이는 민간에서의 위조화 증가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가치의 하락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민간 위조화에서 구리 비율을 낮춤에 따라 실질 가치가 더욱 하락했으며 이는 다시 백동화의 범람으로 나타났다. 백동화의 범람은 곡가를 상승시키고 물가를 상승시켰으며 백동화의 실질가치를 더욱 하락시켰다. 국가 예산의 실질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통화 개혁의 가장 큰 허들은 바로 왕실이었다. 백동화를 왕실 기관인 내장원의 전환국에서 담당하게 함으로서 왕실의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는데 외획(조세징수권에 대한 권리로 선급금을 받는 방식)을 통해 통화를 발행하였다. 통화 발행을 공적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필요에 의해 사유화한 것이다. 실제 실수입의 30%가 외획에 의해서 이루어질 정도였다.


 민간 엘리트에 의한 개혁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광무개혁에 의해서 일정 부분 민간에서 근대적 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대체로 '옛것을 혁파하지 않고서는 새 것을 추구할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개신 유학자는 중국의 변법 운동과 일본의 명치유신에 큰 영향을 받은 집단으로 문명 개화론자가 전통적 요소를 완전히 포기한 것에 비하며 전통과 새로운 것을 절충하고자 하는 집단이었다. 특히 자강을 위한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두 축을 중심으로 개혁을 주장하였다.

 교육은 사회진화론의 세계적 유행에 영향을 받아 교육을 통해서 실력을 양성하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황성신문이 적극적이었다. 학교와 학생 수가 급증했으나 일본에 비해서 1/13의 수준인 2천 명 정도로 턱없이 부족했다. 이 시기에 이미 의무 교육론이 제기되었다. 교육은 보통교육에 방점이 찍혀 전문교육, 실업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특히 전문적인 실업교육이 적극 도입되고 강화되기 시작했다. 황성신문과 입장이 엇갈리던 독립신문 역시 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서구 기술 도입에 대해서는 유교의 이용후생과 격물치지의 논리로 정당화를 시도했다.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으나 이는 좋은 어머니, 좋은 딸 역할에 대한 교육으로서 부국 강병책의 일환이었지 여성의 권리 확보에 대한 의의는 없었으며 문명 개화론자나 개신 유학자 모두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축인 식산흥업은 개신 유학자의 농공상 병진책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개신 유학자는 농본주의의 유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사농공상을 지지했었으나, 농업과 사업을 동시에 발전해야 한다는 중국 상고시대의 교훈을 바탕으로 농공상 병진책을 주장했다. 농업과 관련하여 중요했던 토지제도의 개혁은 지주제를 개혁하는 근본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생산력의 증대를 통한 부분적 해결에 만족했다. 독립신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공업과 관련해서는 공업의 부진이 이권 침탈에 기여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특히 광업에 대해 높은 관심을 두었다. 산업 제품의 수입에 대한 폐해를 지적하며 자체적 공업 발전을 모색하였다. 적극적으로 산업품을 수출하여 수출과 수입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현실 인식도 있었으나 보호무역으로의 옹호로까지 그 논리가 확장되지는 못했다. 

 상업은 조선시대 가장 멸시받았던 영역이었으나 이 시기 진흥이 주장되었다. 황성신문이 적극적이었다. 상업의 발전이 국가의 기틀, 세원의 확보, 학교, 군대, 개혁의 자원이라 주장했다. 

 농공상 개혁을 주도할 국가에 대해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국가 개입을 최소화해서 경제적 자유를 극대화하자는 주장과 상공업 발전을 위해서 국가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라는 주장이 동시에 나타난다. 전자의 경제적 자유는 서구식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국가가 도고 체제와 같이 특권을 주는 것을 반대하다는 의미였다. 독립신문은 이에 더 나아가 회사의 개인투자를 장려해야 한다는 등의 자본주의적 개혁을 주장했다.

 민간 엘리트들은 군주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치체제 즉 입헌을 통한 통치를 주장했다. 입헌군주제의 일본의 근대화의 경험과 영국의 부국강병을 의회제도에서 추론했던 중국의 자강운동이 이에 영향을 주었다. 국가재정구조의 건전화를 요구했는데 구체적으로 정부 예산 범위내에서 관리를 정리하라 요구하고, 지방관 공전 상납을 독려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통폐합하라 재기했다. 군사비를 줄이는 동시에 국가 예산을 투명화하자 주장했다. 그러나 군사비를 줄이자는 것은 현실적 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주장이었다. 대다수의 주장은 세원 확대와는 먼 주장으로 단순히 줄이자는 소극적 대안이었다. 특히 양전 사업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전반적으로 전통적 기반 위에 새롭게 하자는 전면적 인식 개선을 보이지만 유교적인 수시변통을 기반으로 했기에 급진적 개혁 제안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개혁을 위한 자원 확보나 재정의 근대화에 상당한 무신경한 태도다. 실례로 백동화에 대해 지적하나 그 대안이 부재하고 재정 확대에 대한 제안들은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상공업 진흥은 진일보한 의견 개진이라 할 수 있으나 그 차후에 대한 발전에 대한 얘기는 보이지 않는다.


 2부 위로부터의 개혁 역시 상당 부분 아쉬움이 남는 개혁이다. 3부에 대한 얘기가 정리되는 대로 각 개혁 방식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서 같이 얘기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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