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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 진범 Readen May 04. 2016

 조선의 식민과 근대
<근대화의 가능성, 아래로부터>

역사 1권 <근대와 식민의 서곡> 1부 변혁기의 사상과 아래로부터의 개혁

 하나의 주제를 잡고 책 소개를 포함해서 몇 개월간 긴 글을 써 보고자 한다. 선택한 주제는 ‘대한민국을 한번 알아보자’이다. 대한민국이 왜 이러는지, 어떤 부분을 긍정하고 부정해야 할지 한 번 검토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대한민국을 나름 알고 있고, 나름 비판하고, 나름 긍정하고, 나름 사랑하고, 나름 증오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나 잘 알고 그러고 있는지 한 번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대한민국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선택했다. 선택한 책 목록은 3번 정도 글을 올리고 나서 긴 호흡으로 글을 쓸 수 있다 자부할 때 공개하고 그 이유를 밝히겠다. 




처음 선택한 책은 근대와 식민의 서곡(김동노, 2009)이다. 아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헌법 정통성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시작한다. 3.1 운동은 일제 식민 시대에 벌어진 국민저항운동이다. 항상 당연한 귀결로만 여기는 이 식민지로의 이행을 한 번 다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대한민국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왜 식민으로 이행했을까? 우리한테 있었던 자족적 근대화의 가능성은 없었던 것일까? 이 책은 그러한 물음에 훌륭한 답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그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서 회고적 접근법은 탈피하고 전망적 접근을 시도하는 책이다. 회고적 접근법은 그 결론에서 원인을 추적한다. 일종의 결정론이다. 전망적 접근은 당시의 여러 가지 가능성 중 무엇이 탈락하고 무엇이 선택되었는지 검토한다. 이 책은 근대화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우선 <역사 1권 1부>에서는 당시의 사상과 아래로부터의 가능성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그를 위해 식민지 전의 조선의 상황을 간략하게 서술하면 아래와 같다.


경제: 농민경제 파탄, 정치: 신분질서의 변화, 외교: 외세의 침입, 사회: 통제력의 악화

그런데 이는 다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경제: 부농 출현의 계기, 정치: 새로운 계급 질서, 외교: 외세의 활용, 사회: 국민국가로의 도약


 위기란 위험과 기회의 공존이다. 이러한 위기를 타파할 여러 가지 사상적 강구책이 등장한다. 위정척사, 동도서기론, 변법론, 개신 유학자, 문명 개화론이 그것들이다. 그들의 사상과 정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전통적 세계 고수 

    A.     위정척사: 정체성의 위기, 발전론적 시각의 거부와 공간과 주변의 이분법

2)   근대의 탐색

    A.     동도서기론: 기술분야만은 서양, 박규수와 김윤식, 1880년대 통리기무아문 설치, 북학 기반

    B.     변법론: 갑오개혁 유길준 청일전쟁 영향, 법과 제도도 서양처럼, 법 기반의 입헌군주제와 경제제도에 대한 관심, 

    C.     개신 유학자: 광무개혁, 유교 변통론 수용하여 유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받아들이겠다라는 자세

3)   서구적 근대로

    A.     문명 개화론-갑신정변(김옥균, 박영효): 기독교, 공화정, 신분제 철폐 통한 경제개혁, 외세 때문에 실패

    B.     문명 개화론-독립신문과 독립협회(윤치호, 서재필, 안창호): 자주독립, 자주 민권, 자강 개혁, 자본주의 이해 못함(도고 체제 해체와 자유무역 주장), 중립외교 주장, 정치적 필요가 우선됨


 각 사상은 앞으로 서술할 각 개혁에 밀접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에 대해서는 그 부분에서 자세히 서술하겠다.


 농민들도 이러한 시대 변화에 대응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다. 사건 과정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1893년 고부 군수 조병갑에 대한 반발을 기폭제로 동학의 활동이 번성했으며 특히 반제국주의적 운동을 두드러지게 펼쳤다. 조선은 이듬해 5월 7일 농민 자치행정기구인 집강소 설치를 약속하는 등의 전주화약(화해의 약속) 시행했으나, 청은 군사를 조선에 머물게 하기 위해 이에 개입했고 일본은 이를 다시 막고자 개입했다. 개입에 대한 갈등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의 승리로 귀결이 된다.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로 결정했으며, 동학은 종교적 색채가 더욱 강하고 양반 중심의 북접과 농민 중심의 남 접으로 나뉘어 단일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우금치 전투에서 치명적 타격을 입고 끝내 패배하고 만다.


 이 시기에 농민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건 엄청난 기회비용의 상실을 의미한다. 왜 그들은 저항했을까? 일단 조세의 부정은 상시적이었다. 이 시기에만 무언가 특별했던 것이 있었다. 경제, 이념, 조직 세 가지 부분에서 특별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이 상업화되고 무역이 발전하면서 빈부격차가 극단적으로 심해졌다. 이념적으로는 인간평등이나 개벽사상을 주장하며 농민을 무장시켰다. 조직적으로는 포(지역단위) 접(개별단위) 제를 통해 다단계적 거대 조직화에도 성공했다. 그럼에도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했다. 


 동학 농민 운동은 기본적으로 반제국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초기에는 내정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셌으나 점차 반제국주의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일본의 영향으로 경제가 파탄이 났으니 일본을 그 주적으로 삼고 있다. 탐관오리의 처벌이나, 사회 신분질서의 개선, 인간평등, 농업의 상업화의 지적 등 일부 진일보한 의견 개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정을 부정하지 않고 경제제도에 있어서도 변화가 아니라 단순 개선을 요구하는 등 방어적인 운동으로의 한계가 있다.


 개혁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는 2부와 3부의 이야기가 정리된 후에 자세하게 서술하겠다. 각 개혁의 실패 이유는 다른 개혁의 실패 이유와 맞물려있다는 것만 미리 밝히며 1부를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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