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권 <근대와 식민의 서곡> 3부 부르주아로부터의 개혁
조선의 근대화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1부에서는 아래부터의 가능성, 2부에서는 위로부터의 가능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새로운 계급 부르주아지를 통한 근대화 개혁은 가능했었는지에 대해 검토해보자. 부르주아를 통한 개혁은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농업이 상업화(쉽게 말하면 농작물이 시장에서 팔리게)되면 시장경제의 초기 모습이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 성장한 농업 자본가가 산업과 상업으로 진출해서 근대적 부르주아지가 되고 이들이 혁명을 통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갖춘 근대화를 이룩하게 되는데, 이를 부르주아지에 의한 근대화라 한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이 없었는지를 연구한 몇몇의 학자가 있다. 김용섭의 자본주의 맹아론이 대표적인데 농민층이 어떻게 쪼개졌는지를 검토하며 경영형 부농의 존재를 확인한 이론이었다. 특히 최윤오는 경영형 부농, 경영 지주, 부재지주 등등의 농민층의 분해를 입증했다. 이에 대해서 이영훈이 자료의 신빙성과 통계 자료 추론의 타당성을 제기하며 조선은 전반적으로 영세 균등화된 사회였음을 주장했다. 위의 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진 사항이 어떻게 된 것 인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의 농업은 17세기 중후 반부터 개항 이전까지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의 (지금의 오일장 같은) 장시가 열렸다. 개항 이후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쌀과 콩을 중심으로한 원거리 대외 무역이 시작된다. 일본의 요구에 따른 개항이었기에 일본 필요에 의해 시장 모습도 변화한다. 188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수단으로 시장이 동원된다. 조선은 쌀과 콩을 주로 일본으로 수출했다. 1890년대에는 일본의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식품류와 원자재 수입하고 이를 다시 완제품화해서 일본으로 수출한다. 일본의 필요에 의해 산업이 조정되는데 크게 보면 미(쌀을 수출하고) 면(면을 수입하는) 교환 체계가 형성된다. 조선은 수출에 유리한 쌀과 콩 그리고 방직공업 원재료인 면화에 집중하게 된다. 1903년 이후 수입품은 다변화되고, 수출품은 단순화된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교환 체계가 형성된다.
농업의 상업화는 일반적으로 변화의 활력을 제공해 준다. 원거리시장 판매를 통해 지주나 농민에게 생산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해주는데, 사용가치가 아니라 경제적 이윤을 축적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물가와 곡가가 상승하기도 하는데 이는 다시 농업의 상업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토지 소유권을 확대하는 동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농업의 상업화는 누군가에는 부의 기회를 누군가에는 경제적 고통의 근원이 된다.
농업의 상업화는 조선이 조세를 돈으로 내는 조세의 금납화를 시행하면서 모든 농민들에게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각 계급별로 이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다. 지배계급의 경우 새로운 부의 축적 기회로 삼았다. 지방관리는 세금을 화폐 대신 곡물로 받고 이를 빼돌려 시세 차익을 노리거나 곡가를 조정하는 등의 부정을 저질렀다. 일부 지주는 부의 기회로 보고 생산물을 증대하는 노력을 적극적 시도했다. 일부의 부농층도 이에 적극 참여했다. 빈농의 경우에도 세금의 납부, 생필품 구입을 주된 이유로 상업화를 시도했는데 이는 강제화된 상업화의 면을 보여준다. 빈농의 남은 잉여 마저 지주에게로 전이되다 보니 토지의 임대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부농과 지주는 물이 많이 필요한 수전농업을 할 수 있었기에 차익이 많은 쌀농사에 집중했고, 빈농은 수출 수요가 있는 콩 농사에 집중했다.
상업화의 가능 범위를 뜻하는 상업화 가능 지수 [(번 돈–쓸돈)/ 번 돈]로 각 농업 행위자의 상태를 표현하면 지주의 경우 60%, 부농의 경우 40%, 빈농의 경우 20% 정도가 된다. 농업 행위자의 비중과 전체 잉여치의 비중 측면에서 바라보면 2%의 지주가 잉여치의 26%, 4%의 부농이 17%, 94%의 빈농이 57%를 갖고 있는 상태였다.
왜 이렇게까지 각 계급별로 형편이 다양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지주가 농민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주로 소작료를 인상했다. 정률제인 병 작반 수제를 유지하거나 생산량의 ¼, ⅓ 정도만 받던 정액제인 도지제마저 절반 수준으로 인상했다. 거기에 지주에게 부담되는 지세를 소작인에게 전가하기도 했다. 소작료를 화폐에서 현물로 바꾸기도 했는데 이는 상업화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바꾼 것이다. 빈농에게 고리대를 놓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토지를 몰수하는 것은 물론 빈농의 노동을 통제하는 효과를 가지기도 했다.
상인의 참여 역시 이런 형편을 악화시켰다. 상인 역시 상인보다는 지주의 위치를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선호했다. 토지의 소유권은 광무개혁 당시 지계를 통해 국가가 보호했기에 안정적인 자산이었다. 경제적으로도 토지는 상당히 높은 이익을 보장했다. 당시 극심했던 고리대는 재투자시 높은 인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했지만 토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반적으로 토지의 값은 꾸준히 상승했으며 곡가는 꾸준한 이윤을 보장해 주었다. 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부를 추적하는 방식이 생산성을 올리거나 하는 내적 개발을 위한 투자 방식(intensification)이 아니라 토지를 사들이는 외부적 확장(extensification)에 초점이 맞춰 있었다.
농민층은 이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토지에는 크게 두 가지 권리가 있는데 소유권, 전세권이다. 농민층은 전세권 획득에 주력했다. 토지 전세권과 이를 다시 전세를 줄 수 있는 이중소작권에 해당하는 차지권을 지키려 노력했다. 임진왜란 이후 황무지를 개간해서 영구적 경작 권리를 획득하기도 했으며 소작료 선납을 통해 장기간의 전세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정액제의 전세권이 농민층 부 획득에 유리했기에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전세권을 부 획득의 중요 방법으로 삼는 토지 대차인의 권리를 가진 이를 중답주라 했다. 이 당시 빈농은 부농을 택하려는 지주와 맞서고, 부농과는 토지를 빌리기 위해 경쟁했다. 전체 빈농의 70%는 소작농이었고 나머지가 자작농이었다. 일부는 농지를 떠나 산업영역 임금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을 조정해야 할 국가의 대응은 어땠을까? 국가 소유의 공전(公田)과 개인 소유의 사전(私田)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사전의 경우 대지주의 손을 들어준다. 경쟁적이고 합리적인 토지 소유 구조를 국가가 지지할 시에 국가는 이러한 거래를 이행해야 하고 강제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막대한 비용을 내야 한다. 차라리 비효율적일지라도 독점적인 토지 소유구조를 지지하는 것이 국가로서는 그 비용을 낮추는 길이 된다. 독점적 대지주만 관리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의 대주주를 우대하던 태도는 공전에서 뒤바뀐다. 국가의 행정 필요에 따라 운영되던 공전에서 전세권을 갖고 있는 중답주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면세지의 혜택을 노리고 공전으로 자발적으로 편입한 지주와 부농을 실질적 소유주로 인정하던 권리를 부정한다. 보상책에 대한 불만으로 소유권 분쟁이 끊임없었으나 국가는 이를 행정력으로 억압한다.
지주라는 정치적 지배계급은 상업화 기회를 포착해서 다시 경제적 지배계급이 되었다. 빈농의 상태는 심각했으며, 국가는 이 상황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부르주아지 탄생 가능성이 희박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일부분에서 새롭게 지주로 성장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대지주가 되는 데에는 정치적 위상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농업을 합리적 경영하거나, 상업에 종사해서 기회를 포착하거나, 고리대를 통해 토지를 확장하거나, 소작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들은 성장했다. 개인적인 계급 이동 가능성은 이들이 상업화의 기회를 어떻게 포착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경제외적 강제력에서 시장경제 기제의 방식을 부의 전이 방식이 바뀌던 모습을 일부 볼 수 있다. 과도기적 형태 혹은 반(half) 자본주의적인 특징이 드러난다. 정치적 지주에서 경제적 지주로 변화가 일부 보인다.
일부분이라도 있었던 농업 자본의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왜 실패했던 것일까? 영국에서는 이들이 성장해서 정치체제의 변화를 시도했다. 시장경제적 부의 축적이 전통적 체제 내에서 방해를 받자 자신들의 이윤을 보장해주는 시장경제를 정치적 통제로부터 분리하고 자기 조정적 시장을 도입했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이 없었던 것일까? 조선에서는 경제적 지배계급의 교체 혹은 정치적 지배계급의 개편이 보이지 않는다. 변화를 필요로 하는 계급이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다. 대규모의 토지는 그대로 정치적 지배계급의 상층부가 소유하고 있었다. 영국처럼 성장한 자본과 정치 지배 계급이 제한된 토지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제로섬 싸움 상태가 아니라 부가 외부에 의해 커졌기 때문에 계급 간의 이익이 충돌하지 않았다. 농업의 상업화가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변화를 추구할 동인도, 능력도 크지 않았다.
농업이 아닌 자체적으로 상업, 산업 부르주아지가 성장해서 정치와 경제의 변화를 요구하며 전통적 질서를 파괴하는 혁명적 역할이나 근대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할 순 없었을까?
전통적으로 조선은 상업에 대해 터부시 하였다. 이는 개항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개항 이후에 방사형의 구조에서 나뭇가지 형의 개항장 중심으로 시장 구조가 바뀌었는데, 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항구 중심의 시장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개항 초기에는 일본이 개항장 주변에만 머물게 하는 정책 때문에 개항장의 객주와 여각이 시장의 주요 행위자였다. 창고업에 종사하며 발달한 운송업을 기반으로 물품 운반에 대한 이익을 챙겼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조선 농산품의 가치가 올라감에 따라 일본 상인들이 조선과의 무역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거대 지주는 이들과 직접 거래했으나 중소지주는 선대제를 통해 거래했다. 이 선대제는 나중에 고리대의 형태로 변질된다. 일본 상업자본이 조선 시장에 침투함에 따라 상업 부르주아지의 자생적 형성은 불가능해졌다.
산업 부르주아지는 어땠을까? 일단 섬유산업에서 그 가능성이 있었다. 빈농 가계의 여성이 주로 섬유산업에 종사했다. 일부에서는 방직 및 방적 기계를 다수 설치하기도 하였다. 일부 지역은 직접 면화 생산에 주력했으나 대부분의 지역은 면직품 생산에 주력했다. 면 관련 산업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다. 1890년대에 일본의 면직품이 직접 수입되면서 섬유산업은 큰 피해를 겪게 된다. 1900년대 이전 까지만 해도 일본 역시 면직품 생산을 할 여력이 크지 않았고 중개무역 수준에만 머물렀으나 190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는 조선에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발생하게 한다. 긍정적인 효과는 일본의 면사 수입으로 조선 면직물 수준이 올라가게 된다. 이에 따라 지주와 부농은 부를 축적 기회를, 빈농은 재취업 가외수입과 재취업의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시기 조선의 구매력도 일정 부분 높아지면서 면직물 생산을 시장 판매목적으로 활용한다. 부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면사를 확보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경상도에서는 면화를 콩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콩이 가격이 수직 상승했으며 고부가가치의 환금작물인 면화의 생산이 약화되었다. 조선의 수출품이 쌀과 콩으로 단순화되었다. 면화에 대한 자생력의 실종됨에 따라 일본에서 완성된 면직물을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러일 전쟁 이후 더욱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1899-41% 일본 면직물 -> 1908 62%로 상승) 면직물 산업이 버틸 수 없음에 따라 산업자본가의 전환 가능성이 제한되었으며 농업 영역에 남는 것이 더욱 유리하게 되었다.
농업의 상업화, 상업, 산업 분야에서 부르주아지 성장을 통한 개혁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는데 전반적으로 외부의 충격에 대응하는 수준으로만 성장했다는 한계가 보인다. 내생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외부의 충격에 의해 제한 받은 것이다.
다음 4부에서는 근대와 식민의 서곡에 대한 1,2,3부 서평을 기반으로 본인이 생각한 근대화 가능성의 좌절과 그 이유 그리고 시사점에 대해 서술하겠다. 이를 통해 현재를 반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