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치에 대하여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3
자 이제 책을 바꾸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한 책입니다. 정당 정치학자로 유명한 최장집 교수님의 책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입니다. 이 책은 한국 민주주의의 오늘을 과거로부터 반추하면서 왜 민주화에 성공한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보수화되었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민주주의를 따져보아야할까요?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민주주의가 '완벽한 불변의 최선의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토크빌 같은 정치학자는 민주주의를 제도를 넘어선 일종의 사회의 상태로 바라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민주주의는 그 사회적 조건과 구성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어떤 움직이는 것라는 것이죠. 민주주의는 대중 참여를 기반으로 갈등을 표출하고 이에 대해 토론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조율하고 결정하는 정치체제입니다. 참여, 갈등, 대안, 조율에 따라서 변화무쌍한 체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주주의가 그런가요? 아닙니다. 참여는 제한적이고 수많은 갈등은 무시되고 있으며 대안이나 조율은 부재합니다. 현재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는 참여와 대표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투표율은 지속 하락하고 있으며 대안세력에 대한 투표는 사표화되어버립니다. 정치체제가 보수적으로 기울어져있습니다. 한쪽은 아직도 반공주의에 기대어 있습니다. 수많은 가치들이 대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념적 스펙트럼이 협소화 되어있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오래된 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가 정치체제에 아직도 크나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수구언론이나 정치권은 그들의 특권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인 노동자들이 민주주의에서 대표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이를 대표해야 할 정당은 포괄정당, 간부 정당, 선거전문가 저당, 페이퍼 정당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수적(반공주의의 협애화된 스펙트럼) 민주주의가 지속된 결과, 불평등에 따른 경제적 계급구조는 심화되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는 정당성 확보를 위해 부의 재분배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부의 재분배에 대한 규제 장치도 대안 없이 같이 제거해버렸습니다. 재벌의 고삐가 풀려버린 것입니다. 교육은 서열화되었습니다. 수도권의 집중화 경향은 민주화 이후 더욱 심해졌습니다. 자원이 중앙 집중화됨에 따라 자원 분배의 이익이 커지고 이는 다시 지역감정을 발생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민주화란 다원화된 가치의 등장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냉전 반공주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함에 따라서 여러 가치 특히 서민층의 가치는 대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주화 이후 언론은 담론을 지배하는 준사법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언론은 단일할 정도로 반공주의와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언론지형이 민주주의의 다원성을 가로막고 있는 실정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민주주의의 균열은 사회를 대표해야 할 정당이 사회의 여러 이익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민운동은 민주화 이후 부여받은 역할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학은 거대한 입시 학원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여러 가지 장치적 보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마저 옥죄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시작된걸까요? 이에 대해서 최장집 교수는 해방공간부터 시작된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해방 공간'에서 해방은 광복 이후의 시기를 말하며 공간은 권력의 공백 상태를 의미합니다. 권력의 공백은 어떤 정치영역에서 민중의 폭발적 동원할 수 있었던 그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해방 공간에서 대한민국은 냉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냉전 초기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성장한 민족주의의 저항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좌파 민족주의가 민중의 지지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축이 난립함(미국의 이승만, 중국의 김구, 국내의 김성수-여운형-박헌영, 만주의 김일성)에 따라 대안 정부 수립에 실패하게 됩니다. 냉전이 국내화되기 시작합니다. 냉전으로 인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됩니다. 초기에 좌파세력이 우세했으나 삼상회의, 탁치정국,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거쳐 우파의 헤게모니가 확립되었습니다. 극단적 이념 대결 구도의 결과 강력한 우파 헤게모니의 국가가 성립되었습니다. 특히 이 국가는 효율적인 이데올로기 지배를 위해 조선의 중앙 집중형 관료 국가 형태와 강권적 일제 식민 통치 기구 체제를 해방 이후 다시 불러와 활용합니다. 이데올로기 필요에 의해 국가가 지나치게 과대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이념의 양극화는 민족에서 좌우로, 좌우에서 남북으로, 남북에서 사회 내부로 진행됩니다. 민족 대다수가 분단에 반대했으나 이를 공산주의와 친북으로 뒤섞어버립니다. 그 후 남한과 북한에서는 각각 반대파에 대한 축출했습니다. 특히 1946년 3월 북한 토지개혁의 피해자들이 남하하여 강력한 반공 극우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냉전의 적대 관계가 사회 내에서 재생산되며 사회의 스펙트럼을 협소화 시켜버립니다.
남한에서 권력은 냉전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해 집중화됩니다. 유교적 관료문화와 일제 식민 통치기구가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엘리트가 이 구조의 안정화에 기여하며 활약하게 됩니다. 이 구조는 후에 군사권위주의 체제에서 확립되기에 이릅니다. 냉전 반공주의 상황하에 협소화된 스펙트럼으로 인해 대중 참여의 길은 닫히게 되고 새로운 엘리트 진입은 봉쇄되게 됨에 따라 모든 자원을 국가가 독점하고 배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강력해짐에 따라 이를 견제하거나 대안을 제시해야 할 대의 제도는 취약해졌습니다. 자유당과 한민당만 경쟁하게 되었는데 둘 다 동일한 지향을 가진 엘리트이며 그 이외의 계층이나 직업적 이익은 대변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직후 발생한 선거 모두 90%의 높은 선거율을 기록하지만 모두 강제 동원화된 결과였습니다. 1958년 제 4대 총선 전인 3대 총선까지 무소속이 가장 높은 득표율을 얻었습니다. 4대 선거에 와서야 보수 양당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하며 13대 총선전까지의 모습을 담는 정초선거의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냉전때문에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민주화 투쟁과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다양한 가치와 신념'의 등장과 투쟁은 묵살되었으며 공산주의의 배제로 원리로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습니다. 보통선거권 역시 가치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일거에 쥐어짐에 따라 투쟁에 따른 정당 조직 확장의 결과나 대중 중심적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 투표가'공산주의와 북쪽 배제의 논리로 이루어짐에 따라 많은 선거 보이콧이 발생했습니다.
헌법도 만들어지게 되는데 헌법에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나 이론, 이념을 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미국과 서구의 헌법을 빌려오는 것에만 그치게 됩니다. 통일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단순 희망으로만 기록되게 됩니다. 북한에 대한 법률은 헌법이 아니라 그 보다 아래 법규인 국가보안법에서 담아지게 되는 기현상이 발생합니다.
해방공간 시기에 냉전 반공주의가 모든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제압하게 되고 이를 목표로 국가가 과대 성장하게 됩니다. 남한과 북한이 가치를 통한 경쟁적 통합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회 내부의 배제의 논리로서 이데올로기를 활용했습니다. 중간범위의 가치들은 상실되었고, 이 극단적 이념 대결 상황 속에서 손쉬운 자원 동원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아닌 특수이익은 모두 묵살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다원화된 가치를 지향하는 태도이자 제도이자 이념이라면 반공주의 아래에서 질적 향상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 다음 시대인 권위주의에 의한 근대화 시기에 대해서 얘기할텐데요. 이 시기의 여러 변화들도 현재의 민주주의 크나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의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던 반면는 재벌과 행정관료, 언론이라는 그 권위주의의 씨앗을 남겨놓았습니다. 권위주의 근대화시기는 박정희 정권의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경제발전에 성공했습니다. 권위주의 체제가 안정적으로 제도화 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성공이 실패로 이어진 이 모순을 이해하려면 해방공간에서 배제의 원리로 도입된 조숙한 민주주의를 이해해야합니다. 경제발전의 성공으로 교육 및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조숙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결과가 질적으로 결합하게 되면서 이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산업화와 정치체제의 관계를 밝히는 세 가지의 이론이 있습니다. 오도넬의 관료주의적 권위주의 이론은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수입대체 산업화를 의도하고 그 성장 속에서 노동자의 이익 요구가 거세지자 권위주의 체제가 이를 억압하고 극심해짐에 따라 민중봉기가 나타나거나 권위주의가 공고화된다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 이론과 다릅니다. 이미 권위주의 체제가 충분히 성장했고 국가가 노동자의 이익 요구를 쉽게 탄압합니다. 억압과 성장의 변증법이 없습니다. 립쉣과 쉐보르스키 혹은 쉐보르스키와 리몽기는 경제성장과 산업화가 민주주의를 가져온다는 점을 양적인 분석 방법으로 밝히는데 굉장히 일국적 단위의 분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어의 이론의 경우 정치체제의 사회적 기원에 따라 근대화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국가를 단순히 결과로만 바라본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체제와 민주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업화의 타이밍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오직 반공주의의 기치를 내건 채(= 이데올로기적으로 탈동원화) 강권적 국가 하부기반을 형성합니다. 토지개혁을 실시하는데 한국전쟁 이후였기에 모두가 황폐화된 땅에서 가난했던 시기였습니다. 국가의 아래에서 평등하다는 강력한 사회 평등주의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4.19 혁명 이후 1년 남짓해서 잠시 등장한 민주화 정부는 적극 활용할 산업화의 유산이 부재했고 이들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 시기 가장 강력한 국가 강권 기구는 군대였는데 이들이 박정희 정권을 만듭니다. 박정희는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경제성장의 기치를 내겁니다. 강력한 국가 기반을 활용하는 대신 경제발전을 약속한 것입니다. 잠깐의 민주정부는 그 무능함을 보여줬기에 백지위임장을 쥔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새로운 기반의 신흥 산업 엘리트를 키웁니다. 지주가 성장해 부르주아지가 된 서구와 달리 국가가 이들을 키운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 실행의 원동력은 경제 기획원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 같은 정보의 독점 기관을 설립함으로서 국가 행정 체제를 공고히 하고 신흥 산업 엘리트를 적극 지원합니다. 이 시기 경제성장의 결과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지지자 중 일부가 민주주의의 지지자가 되기도 합니다.
우선 박정희의 권위주의 정부는 누가 지지했을까요? 첫째로 신흥 산업 엘리트의 중심이었던 재벌이 지원하게 됩니다. 이들은 박정희 국가계획의 대행자로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이 국가 계획의 대행자라는 점에서 이들은 시민사회를 대표하지는 못합니다. 산업화의 과실을 얻게 되는 도시 중산층도 한때는 지지합니다. 이들 중 다수는 대기업의 신중산층이었습니다. 훗날 이들은 도시 교육의 영향으로 친민주주의적 성향을 갖추게 되며,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합니다. 무엇보다 농민과 노동자들이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습니다. 산업화의 효과가 직접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농민의 경우 새마을운동의 효과를 느끼고, 2차 산업에 필요한 쌀이나 음식을 공급하는 곳으로서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노동자는 농민에서 이탈한 이들이 대다수로 도시생활을 함에 따라 소득향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노동자들의 경우도 60~70년대의 조직화 결과 노동운동을 하게 되고 민주주의 지지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시기 주목해야 할 선거가 있습니다. 5대 1963, 6대 1967, 7대 1971년 대선입니다. 1963년 박정희는 경제성장의 기치로 1.1%의 신승을 기록하게 됩니다. 1967년 51.4%의 득포 10.1%의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되는데 이는 국민들이 경제성장에 대해서 광범위한 지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1년에 7.9%의 차이로 당선되기는 하나 당시 신민당 후보로 나온 김대중 후보가 받은 득표율이 45.3%였습니다. 이 수치는 놀랍게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때 얻은 득표율보다 높은 수치였습니다. 특히 이듬해 총선에서는 지난 총선에서 17.1% 차이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여당이 4.4% 차이로 그 격차가 더욱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3선 개헌의 여파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서 국민들이 일종이 신호를 던진 것이며 박정희 지지세력 중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 지지세력으로 돌아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박정희 권위주의 성공은 민주주의의 공간을 여는 역설적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경제발전을 통해 근대화의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산업화가 성공함에 따라 그 결과로써 다른 대안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고, 권위주의 정부 자체적인 민주화에 실패함에 따라 민주화 세력이 형성할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일부의 긍정적 평가는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했던 시기까지 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개인 역시 모든 권력이 본인에게 집중되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권위주의 아래 고도성장을 주도한 경제기획원 관료에게 권력이 초집중화되었고, 권력과 자본이 긴밀하게 유착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권위주의는 재벌을 통제할 수 없는 범위까지 이끌었습니다. 민주화를 통해 정치부문에서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지언정 경제적 시장에서 재벌에 대응할 힘을 키우지는 못했고, 이것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주화의 결과로써 상당 부분의 권력이 국민이 아니라 재벌에게 돌아가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현재 재벌은 권위주의의 최후의 생존자로 권위주의가 추구한 효율지상주의와 관료적 경영주의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재벌과 함께 성장한 관료체제는 행정권력을 독점하고 있으며 하나의 이익 집단화되어 국민의 이익실현보다는 기득이익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 정부에서 노동을 경제성장의 목적 아래 통제함에 따라 노사관계에 대한 발전적 논의는 부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생산과 노동'의 영역은 소외되었습니다. 언론은 어떠할까요? 본래 4.19 혁명 당시 언론은 권력의 최대 비판자였습니다. 대학과 연합하여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이르러서는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유신체제는 언론의 비판적 기능을 철저하게 봉쇄해버렸습니다. 신군부 아래에서 언론은 권력의 수동적 대행자 역할을 했으며, 그 이후에는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권위주의 체제는 기자, 군부 엘리트, 재벌, 테크노크라트에 의해 망령처럼 살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