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치에 대하여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2/3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1. <해방공간과 권위주의 근대화>을 통해 이승만 정권기에 냉전이 사회화되는 과정 속에서 반공주의만이 유일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이를 공고화하고 강제화하기 위해 배제의 논리로 민주주의가 조숙하게 도입되고, 국가가 과대 성장했으며 이것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경제발전이 민주주의 기반이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했지만 아직도 그 권위주의의 씨앗이 재벌, 언론, 관료 등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음에도 우리 사회는 곧바로 민주화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80년 5.18 민주화 항쟁이 있었지만 성공적인 결과를 낳지 못했고 오히려 안타깝고 처참한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87년 6.29에 이르러서야 민주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5.18과 6.29 이외에도 우리 사회는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4.19 혁명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의 민주화는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회 내에서 무언가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포착되는 것인데요. 냉전 반공주의의 강력함이 존재해 있더라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반공, 권위주의 세력을 쫓아내곤 했습니다. 이런 운동으로는 노동운동, 민중운동, 학생운동을 들 수 있는데요. 특히 학생운동이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민주화 움직임 이외에도 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운동, 68~69 3선 개헌 반대운동, 73~74년 반유신체제 운동, 80년 서울의 봄 등등 많은 민주화 운동에서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때 야당은 반대 세력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거수기 역할만 하고 있었습니다. 권위주의 체제나, 신군부 체제나 모두 최초의 도전과 반대는 모두 학생에 의해서 수행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치적 기회를 창출한 것입니다. 학생은 최초의 운동 집단이며 공감과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계속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으며 이 노력은 여러 계층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학생운동과 함께 민중운동도 성장했습니다. 근대화의 효과로 절대적 박탈감을 벗어나기는 했으나 상대적 박탈감이 증가한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근대화의 효과가 재벌 편향적으로 분배되었습니다. 산업화의 성공 이후 물적 보상 욕구와 권리의식이 증가했고 학생중심의 민주화 운동 역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권위주의 체제는 재벌 중심의 경제 발전을 위해 노동을 억압했고 노동운동을 가장 큰 골칫거리로 규정했고 탄압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같은 경우 이를 탄압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정부가 성장했던 것과 달리 대한민국은 이미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성장한 과대 국가가 노동을 높은 수준으로 억압했습니다. 80년의 서울의 봄의 시기가 되어서야 노동운동이 여럿 발생했습니다. 신군부는 이 노동운동과 직접적으로 맞딱뜨려야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일종의 패턴을 갖고 있습니다. 학생이 그 중심세력을 이루고 지식인이 이를 배후에서 지지합니다. 운동의 가장 큰 이슈는 독재타도였습니다. 비폭력적인 학생시위가 정권을 붕괴시켰습니다. 이데올로기로 강하게 무장한 나라였지만 그 지지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민주화 이슈가 부각되고 그 후에 노동문제들이 제기되고 시작합니다. 이내 민족문제 해결의 논리로 귀결이 되는데 논리가 진행될수록 지지기반이 점차 허약해지고 이내 운동의 성과가 사라지게 됩니다. 운동이 급진화할수록 이데올로기적 과장이 섞이게 되고 이에 사회적 지지기반도 조금씩 상실하게 됩니다. 운동의 중심세력인 학생이나 노동자가 중심 행위자가 되지 못합니다. 정당 역시 운동과 친밀한 것이 아니라 분리가 됩니다. 안타까운 점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시간차를 두고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시간차가 발생함에 따라 단일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6.29 민주화는 협약에 의해서 마무리가 됩니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에 의해 권위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협약에 의한 민주화에 의해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가 수립됩니다.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지역주의 정당체제로 완결됩니다. 과거 야당보다는 여당이 오히려 국민적 지지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더 개혁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야당의 경우 이념 국가가 지닌 협소한 스펙트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협소화된 스펙트럼에서 반공주의의 언어만 대표되고 다른 정치적인 언어들 예를 들면 인민, 계급, 노동자와 같은 서민적 가치들이 표출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여당은 관료를 바탕으로 견고한 정당 구조를 만들며 제도 내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대변하고자 했고, 야당은 재야 세력이나 제도권 밖의 개혁그룹이 보수적 명사와 결합해 이에 대응했습니다.
이러한 대립 속에 권위주의 세력은 지역 간 구도를 사회적으로 활용하고 동원합니다. 지역이라는 손쉽게 활용 가능한 편향성을 동원한 것입니다. 지역문제의 본질은 '호남소외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엘리트나 자원 충원 구조에서 호남을 배제했습니다. 이때 김대중과 호남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있고 이는 광주 민주 항쟁으로 이어집니다. 민주화 이후 대중적 성격을 일견 보이기도 하지만 지역주의 체제가 '호남은 적화되었다'는 등의 냉전 반공주의의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지역주의 정당체제는 민주화라는 열망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지지기반이 이념이 아니라 지역적 요소와 결합이 되었고, 지지자의 정체성과 리더의 정체성이 다소 불협화음을 이루었습니다. 예를 들면 강력한 당 지배를 추구하는 리더(최장집 교수는 보수적이라고 표현합니다)와 민중적-수평적 태도를 견지하는 호남이 결합하였고, 호남의 지역주의와 민주화 운동이 견지했던 보편주의가 섞여버렸습니다.
민주화는 여당-집권세력 내 개량파와 야당-민주화 진영의 온건파 간의 협약에 의해 제도화됩니다. 집권세력이 뭉쳐있었기에 민주화 세력이 제대로 된 대안만 제시했더라면 충분히 대안적인 경로로의 진행이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협상 과정 상에서 냉전 보수주의의 이념이 과잉 반영되고 정작 운동의 주체였던 국민운동본부는 8인 정치회담에서 배제됩니다. 이때 개정된 헌법 역시 참여자가 의제를 설정하게 되었는데 그 참여자들이 냉전 보수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이들이었고 이는 다시 헌법이 냉전 때 고정된 모습을 벗어나지 못 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1958년 체제의 보수적 경쟁이 지속되었습니다. 표를 얻고자 하는 경쟁압력은 새로운 정치언어를 탄생시키지 못했습니다. 1987년 두 번째 정초선거가 발생하는데요. 정당의 보수적 요소, 지역적 요소, 운동적 요소중 유독 지역적 요소가 부각됩니다. 호남 문제가 특히 부각됨에 따라 보수적 요소도 사그라들었습니다. 운동적 요소가 이후 지역문제에 얽혀 붕괴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민주화는 운동적 요소의 붕괴와 보수적 요소 및 지역적 요소의 강화라는 역설적 결과로 낳았습니다. 대의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국가가 너무 강했습니다. 국가가 반공 헤게모니를 쥐고 권위주의를 제도화했습니다. 이에 맞설 강력한 대안이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민주화가 나뉘어 진행되어 지역주의로 채색된 점도 컸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민중봉기였는데 이것이 호남 대 비호남 구도로 해석되어버렸습니다. 운동이 거세게 진행되었음에도 운동권 스스로 조직이나 능력에 있어 약했다는 점도 컸습니다. 운동권 스스로가 정당 세력으로 크지 못하고 민주적 제도화에 대해서는 정치적 엘리트에게 대신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호남 대 반호남 저지할 영향력을 갖추지 못했고 결국 후보 단일화 실패합니다. 당시 운동 세력은 주체적인 역량보다는 낭만적이고 도식적인 교리에 빠져있었고, 강렬한 투쟁 속에 현실과 괴리된 강력한 이론만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이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야당이 너무 약했습니다. 민주화 의제를 충실히 이행할 의무가 있었는데 그렇지 못 했습니다. 민주화의 진행 과정이 기대 이하의 수준으로 진행됨에 따라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가 나타났습니다. 갑작스럽게 야당이 집권세력의 핵심이 되었는데 전반적으로 그들의 질적 수준은 낙후되어있었습니다. 국가 운영에 있어서도 정치적 리더에게만 의존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야당 정부는 초기에는 지역적 요소와 운동적 요소를 강하게 결합시키며 개혁적 성격을 부각합니다. 그러다 한정적 자원을 지역에 집중 동원하는 등의 지역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화하면서 운동적 요소가 차츰 사라지게 됩니다. 이에 따라 국가를 운영할 엘리트가 현저하게 부족해지게 되고 다시 필연적으로 국가의 보수적 관료에게 국가 관리를 의존하게 됩니다. 국가 운영에 있어서 대표성을 중시하기보다는 폐쇄적인 엘리트 구조에서 충원하기 바쁘게 되고 이에 따라 지지세력이 이탈하게 되며 국가는 관료에 의해 다시 보수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