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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 진범 Readen May 28. 2022

버닝. 무엇을 태워야 했던 것일까?

영화 버닝의 태움 리뷰

 영화 버닝을   제법 오래되었다. 3년간  영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 생각할까. 이창동 감독은 영화로 시를 쓴다. 세상과 시대에 대한 메시지가 흐른다. 버닝 역시 비유와 현실  사이다. 청춘은 무엇을 태워서 (아니 태우지 말고) 살아야 할까? (아니 죽어야 할까? )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많으니까, 영화 보신 분만 읽어주세요 :)




 영화는 태움(버닝)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태우거나, 태워야 했거나, 태우지 말아야 했거나, 태운 것에 대한 이야기다. 태움에 집중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버닝과 관련된 것은 어머니의 옷이다. 아버지는 공권력에 대한 짙은 혐오를 가진 사람이다. 오직 자신만의 가치가 세상에 증명되기를 바란다. 공권력에 대한 도전은 세상 모든 곳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어느 과거에서만 가능했던 인정투쟁이다. 아버지는 도망간 어머니의 옷을 태우게 함으로써 아들에게 중요했던 사랑을 태웠다. 결국  태워진 사랑은 빚을 남긴다. 마음속 깊은 우물도 남겼을 것이다


 두 번째로 아버지의 탄원서다. 아버지의 오래된 변호사 친구는 자존심을 죽여서라도 탄원서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리기를 원한다. 아들은 마을 사람들을 만나나, 모두 우호적이지 않다. 아들은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 소설가로서 키워야 했던 능력을 아버지를 위해 쓴다. 소설로서 쓰인 탄원서는 태워야 했던 것이다. 자신의 미래나 꿈을 앞선 세대에게 낭비하지 말아야 했다. 앞선 세대에게, 거짓된 세대에게, 역사의 법정 앞에서라도 거부할 수 있어야 했다. 태워야 했던 탄원서이다

 세 번째로 '해미'다. 해미는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귤의) 존재를 잊음으로 해서 의미를 찾기도 하고, 멀리 아프리카로 떠나 의미를 찾기도 하고, 고양이에게 '보일'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의미가 있다면 무엇이 되어도 상관이 없다. 벌거벗은 무녀가 되어도, 큐레이터 모델이 되어도, 어떤 술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도 된다. 주인공은 그 의미가 내게만 의미이기를 바라나, 그 의미가 다른 이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해미를 부정한 사람이라 부정한다. 자신에게 의미였을 때 해미는 합일의 대상이었으나, 본인이 부정한 후 해미는 더 이상 의미가 되지 못한다. 주인공은 해미를 마음속에서 태우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마음 깊은 곳(우물)에서 건진 의미(해미)를 태우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네 번째는 '벤'이다. 벤은 경제적 자유를 가진 사람이다. 벤의 자유는 비닐하우스처럼 텅 비었고 투명하다. 비로소 태워야 그것이 투명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것만이 벤에게는 재미이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도 사실은 재미의 일환이다. 재미있기만 하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주인공은 벤을 의심하고 혐오하나 동시에 동경한다. 확신하나 망설인다. 허나 주인공의 삶은 재미도 경제도 아니다. 내가 버린 의미(해미)다. '보일'을 안고 나서야 보인다. 의미는 내가 태웠지만 그것은 벤 때문이다. 벤의 재미 때문이다. 의미를 찾기 위해 없애서 태워야 한다. 그래야 내가 버린 의미를 다시 되돌려 받을 수도 있단 꿈이 생기니까, 하지만 생기지 않는다. 내가 의미를 인정하고 발가벗더라도 의미는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의미를 찾기 위해 다시 소설을 써 내려갈 뿐이다.  



내 소설(삶)에서 무엇을 갈망(버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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