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기록

합리와 불구의 경계에 선 언어의 실격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을 읽고

by locki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리 철학 논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명제도 자기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진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명제 기호는 자기 자신 속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표 내의 주체와 언표 행위의 주체는 각각 '말하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라는 차이로 인해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는 유형 이론으로, 언표 내의 주체는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게 되는 것, 즉 낱말은 문장 안에서만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정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한 모든 명제는 결코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 더불어 이러한 명제화가 만약 자기 스스로 행해지는 것이라면, 이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불구화' 사이의 정체성

형성일 것이다.

이야기 속 수기와 후기에서의 화자인 '요조'의 수기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특성은 작은따옴표(")를 다수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모든 '언어'는 그에 의해서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부터 세상의 이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스스로 정의 내린다. 최종적으로 그는 '인간'이라는 진리의 대상으로부터 비껴간 자신을 더 이상 정의하지 못하게 되며 비로소 '인간 실격'이라는, 즉 '정의'보다는 '현상'에 가까운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정의의 과정은 '인간 실격'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관장한다. '요조'의 사진을 관찰하는 '나'와 수기 속 '요조'의 분리에서부터, '요조'가 자신의 생애를 서술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작가 다자이가 활용한 언어를 살펴보며 이야기를 읽어 내리다 보면, <인간 실격>을 한 단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와 함께, '나'가 발견한 세 장의 사진을 따라 '요조'의 세계로 발을 들여 보았다.

이야기는 '나'가 사진 세 장을 발견하면서 시작되는데 각각 다른 시기의 '요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초등학생, 중학생, 그리고 고등학생 이후의 사진으로 추정되는데. '나'의 감상에 따르면 첫 번째 사진은 통속적인 귀여움이 느껴지나 기분이 나쁘고, 두 번째 사진은 가짜 같은 가벼움을 지녔기에 기묘하며, 마지막 사진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이 없어 괴이함을 준다고 한다. 이 사진은 어쩌면 '요조'가 적은 수기의 요약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수기를 살펴보면 첫 번째 사진은 그가 '익살'을 사용하여 대인 관계를 유지할 시기이다. 세상의 다양한 시스템이 재미가 아니라 실리를 추구하여 탄생한 것이라는 데에 실망을 한 '요조'는, 대인 관계 형성이라는 실리를 위하여 겉보기에 재미를 추구하는 듯한 익살을 선보이는데. 이는 그가 깨닫게 된 세상의 이치의 언어와 부합하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무(無)‘의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 그의 '익살'은 '나'가 사진에서 느낀 통속적인 귀여움에 대응하는 언어로 보인다.

'요조'는 중학교에 올라가며 고향에서 떠나왔다는 이유로 익살에 더 능한 인물이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의 익살을 꿰뚫어 보는 친구인 '다케마즈'와 만나게 된다. '다케마즈'의 행동과 언어로 혼란을 얻은 '요조'는 점차 그의 세계를 정의하기 위한 언어를 창출해 낸다. "여자들이 따르는 괴로움' 따위의 속된 말이 아니라. '사랑받는 불안'이라는 문학 용어를 사용한다면. 반드시 우울의 가람을 무너뜨리지는 많을 테니까. 기묘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언어를 통한 자기 세계의 구축에 대한 흥미를 나타내는 문장도 등장하는데. 이는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마이스터와 같은 경우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하여 아름답게 창조하기도 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숨김없이 표현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그가 자신에 대한 명제의 정의로, 즉 이룩할 수 없는 겉껍데기 언어로 삶을 이루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이때 그는 자신을 '매춘부와 동류'로 칭하며 '나'가 사진에서 느낀 '가벼움'을 좇는 방랑자가 된다. 지하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며 '요조'는 운동의 본래 '목적'보다도 운동의 '본질'이 자신에게 맞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동안 실리를 위해 익살을 연기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사고하게 되는 계기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요조'는 드디어 목적이 아닌 인생의 '본질'에 대한 열망을 가진다. 그러나 이미 망가져 버린 그는, 그러한 '본질'이라고 여기는 '행복'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재정의하게 된다. 대의명분이라는 핑계 뒤에서 결국 세상은 하나의 개인으로 존재하고 마는 것이라는, 세상과 개인의 동일성을 강조하며 그는 '목적과 '본질'의 잣대 가운데서 '목적'을 삭제한다. "예전처럼 이것저것 끊임없이 걱정하는 일도 없이. 말하자면 당장의 필요에 응하여. 어느 정도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익히게 된 것입니다." '본질'이 앞선 삶을 살게 된 '요조'는 결국 그중 하나인 '사랑'에 버림받음으로써 완전한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신뢰와 무저항이 죄악인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요조'는 모든 '기쁨'에서 멀어진다. 여기서 '요조'는 그가 세운 사상처럼 계속하여 '본질'에 관한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 '본질'의 출발점인 '인간'이 자신이 지나와버린 그동안의 세상이었다는 최종적 결론을 내리며 그는 '인간'에서 벗어난 것을 자기 자신으로 정의한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 '요조'는 여기서 세 번째 사진은 인상이 없는 듯한 얼굴이라는 '나'의 감상과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언어는 세상을 정의한다. 그러나 그 모든 언어는 내 안에서 존재할 뿐이다. 마담은 '요조'가 하느님같이 착한 인물이라고 평했던 것처럼. 그의 '실격'은 스스로 가둔 언어의 정원에서의 추방이었던 셈이다. 이는 '나'와 '요조'가 분리되는, 언어를 통한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 불구화를 보여주며 완벽히 수미상관을 이룬다. 이런 정의 내림의 밑바닥으로 시선을 내려보면, 작가와 '나'와 '요조'는 하나의 세상 안에 존재할 것이다.

<인간 실격>은 언어가 주는 합리성, 또 언어가 주는 파멸감은 어디까지인지, 또 그것은 결국 내 안에서 나가지 못하는 명제가 아닌지 고민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 소설은 '요조'가 스스로 불러온 '언어'의 실격으로 이룩한 파멸의 말로(末路)를 보여주지만,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세계의 무한한 확장성의 희망을 얻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웅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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