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를 읽으며
” 완벽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이지 않은 냉정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냉정함은 완벽함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위대한 예술가의 직업 앞에서 경건하게 감탄한다. 우리는 완벽함에 근접한 그의 업적을 사랑한다. 그것이 오직 근접함이기 때문에. “
‘완벽’을 정의하며 이를 칭송하는 일은 흔하다. ’ 완벽‘은 없다던가, 혹은 ’ 완벽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근접한 완벽’을 사랑한다는 그의 고찰은 인간으로서 어딘가를 간파당한, 그것도 그 누구도 건드려본 적이 없는 듯한 곳에, 문장으로부터의 타격을 받은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책을 덮으며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처음부터 ‘완벽의 근접성’이 아름다움의 척도였다면, 세상이 조금 더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고민들. 그가 방랑자의 페르소나로 적어 내린 <불안의 서>는 모든 구절이 그렇다.
대한민국 힙합 그룹 ‘에픽하이’의 음악을 들을 때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염세주의, 허무주의, 사회 비판. 이런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그들의 가사가 과연 삶을 비관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것이다. ’ 구멍 난 내 가슴이 밤으로 채워져도 반드시 해가 뜨니 ‘ 이십 년째 꾸준히 등장하는 새로운 곡들을 맞이하며, 그들의 염세 내지는 허무가 일종의 ‘희망’인 것은 그들이 여전히 가사를 적고 있다는 ‘행위’ 덕분일 것이다.
이를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며 그때와 비슷한 감상을 느꼈기 때문이다. 책이 매우 두껍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불안정한 <불안의 서>가 아름답게 와닿은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저자 페르난두 페소아는 포르투갈의 시인, 작가이자 철학자로, 사후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시인으로 꼽히며 <불안의 서>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의 작품들은 이명(異名)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독특하게 느껴진다. 확인된 이름만 총 75개라고 한다.
진중권 교수(광운대학교 특임교수)는 2010년 7월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명 사용에 대해 “여기서 우리는 정체성의 추구와는 반대되는 충동을 본다. 정체성(identity)이 ‘A=A’의 동일률에 집착한다면, 이명(heteronym)은 한 인격 내에 잠자는 상이한 가능성들을 현실화한다. 그것의 격률은 A=B=C=D=E, 즉 ‘너는 지금의 네가 아닌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어설픈 현자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 곧 삶일지도 모른다. 나를 맴도는 어설프고 주눅 든 나, 나에게 해로운 것만을 달콤하게 권하는 협잡꾼인 나, 나에게 위선 아니면 위악만을 가르치는 감독인 나, 나에게 거짓 눈물과 거짓 한숨과 거짓 웃음을 사탕처럼 던져주는 사육사인 나,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아도 어딘지 모를 불안과 불쾌감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나. 그 모습을 비웃는 구경꾼인 나. 그런 나와 결별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만이 방법 일지도 모른다. “
그의 이명 철학, 즉 정체화 자체의 부정은 이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삶을 망각하라’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가 수많은 존재라면, 그 모든 ‘나’를 하나로 합쳐 A=A로 정체화하려는 노력이 보편적이라면, 그는 그 과정을 ‘포기’했기에 A, B, C, D, E,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그저 수중에 올려두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결과는 꽤 놀랍다. 그동안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만이 ‘나’를 알아가는 길이라고 배웠던 우리에게 정체성을 ‘포기’하자니, 충격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을 깨닫는 동시에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게 된다.
“나는 삶에게 극히 사소한 것만을 간청했다. 그런데 그 극히 사소한 소망들도 삶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 줄기의 햇살, 전원에서의 한순간, 아주 약간의 평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빵, 존재의 인식이 나에게 지나치게 짐이 되지 않기를,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리고 타인들도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런데 이 정도의 소망도 충족되지 못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내기 귀찮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지 않은 것처럼, 삶은 나를 그렇게 대했다. “
어떤 이들은 이러한 구절을 두고 <불안의 서>를 두고 슬프거나, 우울한 책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삶은, 그저 나와 일순간 나란히 걸어 지나가는 존재임을, 그렇기 때문에 그저 사소한 소망일지라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슬픔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타인과 살아가며 우리는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보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이 모든 문장은 말로(末路)가 아닌 ‘시작’이 된다.
“내일이면 나 또한, 생각하고 느끼는 이 영혼, 나에게는 우주 자체나 다름없는 나 자신도, 내일이면 이들 거리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그 사람이 요즘 왜 안 보이는 거지?‘하고 문득 떠올릴 것이다. 내가 한 모든 일, 내가 느낀 모든 것, 내가 산 모든 삶은, 어느 도시의 어느 거리를 매일 지나다니던 행인 하나가 줄어든 사건으로 요약되고 말 것이다.”
책의 마지막 구절이다. 저자가 ‘소아레스’라는 페르소나로 적어온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 소아레스는 이 책 속 어딘지 모를 리스본 속에 평생이고 머물며 사라진 어떤 행인, 그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우린 때로 ‘무언가’가 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저 삶이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건 그러한 것이라며 말이다. 하지만 ‘무언가’ 같은 건, 역시 없어도 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만들어 내었던 그것은, 결국에 우리를 ‘어떤 것’이었던 ‘어떤 삶’의 ‘어떤 행인’으로 정의하고 말 것이니까.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슬픈 것이 아니다. 그저 물음표의 삶을 살아가는 물음표의 인간으로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러니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무한한 세계를 깊이 받아들이며, 수없이 늘어나 방황하는 나의 무수한 ‘또 다른 나’들에게 길을 터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