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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Jan 07. 2018

빈티지의 천국, 런던

오래된 것이 좋아



빈티지 마니아

Vintage Mania


나와 영원은 '빈티지'를 사랑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랑해 마지않는다'. 연애 시절엔 종로 5가의 구제시장부터 시시때때로 열리는 지역 플리마켓은 물론이고, 지하철 역마다 있었던 빈프OO이라는 중고 의류 매장까지 부지런히 섭렵했다. 물론 장애물이 없는 사랑이란 없다. 우리의 빈티지 사랑에도 숱한 방해세력이 등장했다. 한 봉 가득(그렇다. 빈티지는 자고로 봉지에 담아야 제 맛인 것이다.) 빈티지 옷을 사는 날이면 엄마의 시름은 깊어졌고, 처음에야 지나가는 잔소리로 시작된 엄마의 만류는 몇 해가 지나자 '제발 새 옷 좀 사 입어.' 하는 식의 애원조로 바뀌었다. 빈티지 옷을 입고 나가는 날이면 '남이 쓰던 걸 왜 돈 주고 사 왔냐'하는 레퍼토리의 핀잔은 단골손님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포기할쏘냐. 빈티지의 장점을 꼽자면 두 손이 부족할 정도다. 새 옷의 1/2에서 1/3까지 내려가는 만족스러운 가격은 물론이고, 내가 입은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안도감이 좋다. 환경에 덜 빚지는 기분도 상쾌하고, 무엇보다 빈티지 특유의 스타일이 몹시 마음에 든다. ‘以不變應萬變'(이불변 응만변). 변하지 않음으로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한다는 호찌민의 명언으로 빈티지를 수식한다면 너무 과한 상찬일까. 하지만 부지런히 트렌드를 찍어내는 이 시대에 변하지 않음으로 가장 유니크한 자리를 선점한 빈티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새 것과 옛 것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도시, 런던



빈티지가

더 아름다운 나라


그런 우리에게 영국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100년은 우습고 200년, 300년이 되어가는 건물들을 도시 한복판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나라. 주말이면 도시 곳곳에서 플리마켓 Flea-Market이 열리는 곳. 1800-1900년대에 지어진 건물에서 사람이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살고 있는 동네. 런던은 온 도시가 빈티지 그 자체인 셈이었다. 


우리가 묵었던 해티와 조쉬네 집도 1901년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물론 부엌과 욕실은 리모델링을 깔끔하게 한 상태였지만, 100년이 넘은 집의 흔적을 감추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거실에 깔린 나무 바닥은 삐걱삐걱 심상치 않은 소리를 냈고, 거리를 향해 난 커다란 창문에서는 바람이 새는 것만 같았다. 해티가 일하는 미술관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무려 1400년대 지어진 건물이란다. 1400년 대면,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초기쯤 이려나. 출입금지가 붙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건물에서 사람들이 살고 일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해티 말로는 예쁘고 좋긴 한데 춥고 불편하단다. 말은 그래도, 빈티지는 포기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방구석구석 놓인 앤티크한 소품들이 그녀의 말을 반증(反證)하고 있었다. 이후 만났던 많은 영국인들도 오래된 것에 유난히 자부심을 보였다. 새 것보다 빈티지를 더 아름답게 여기는 듯했다.  

  

100살은 족히 넘었다는 해티네 집.





오래된 역사(驛舍)가 아름다운 런던 리버풀 스트릿 스테이션 London Liverpool Street St.





참새 방앗간,

세컨핸드 샵


무엇보다 영국 곳곳에서 지나칠 수 없는 우리의 '참새방앗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각 구호단체에서 운영하는 중고매장. 우리나라로 치면 '아름다운 가게' 같은 곳들이 거리에 즐비해 있는 셈이다. 옥스팜 Oxfam(*영국에서 시작한 구호단체, 옥스팜에서 운영하는 세컨핸드 샵이 유명하다.) 같은 세컨핸드 샵계의 큰 손들은 레코드, 책, 의류 등등 품목을 나누어 매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전문적인 운영이 가능할 만큼 중고거래가 활성화되어 있는 셈이다. 세컨핸드 샵이 많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더욱 놀랐던 것은 물건의 양과 질이 탁월하다는 것. 때문에 런던에 도착한 첫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세컨핸드 샵에서의 쇼핑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남는 건 쇼핑뿐이라며 매일 하나둘씩 집어오다 보니, 두 개로 떠난 가방이 어느새 세 개로 늘어나 버렸다. 



여행 첫 날, 처음 방문한 세컨핸드샵Second-Hand Shop.





완전 신남.




We Love,

플리마켓


빈티지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플리마켓. 런던은 이미 플리마켓으로 유명한 도시다. 포토벨로 마켓 Portobello Market을 비롯해 캠든 Camden이나 브릭 레인 Brick-Lane은 여행깨나 했다는 사람들이 들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런던에서 주어진 시간은 단 5일. 마켓만 돌아다녀도 아쉬울 것 같은데, 그 마저도 마켓을 위해 다 쓸 수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했다. 심지어 플리마켓은 주말만 여는 곳이 많으니 선택지는 더 적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마켓을 몇 개를 추려냈다. 현지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마켓을 찾고 싶어 굳이 영국 사이트를 뒤졌다. 우리의 선택은 올드스피탈필즈마켓Old Spital Fields Market, 브릭 레인 마켓 Brick Lane Market. 마지막으로 런던 끝자락에 있는 그리니치 마켓 Greenwich Market으로 좁혀졌다. 요즘 런던에서 핫하다는 해크니 Hackney의 브로드웨이 마켓 Broadway Market을 꼭 가보고 싶었지만 주말만 여는 바람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플리마켓은 기대 이상이었다. 반짝이는 가을 햇살 때문인지 묘한 활기가 도는 날이었다. 물건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도, 곳곳에 진열된 물건도 각자의 개성으로 반짝였다. 그들이 가진 '하나뿐인 특별함'에 취해 정신없이 쏘다녔다. 아주 오래전 만들어졌다는 베네통 원피스도 만났다. 이태리에서 만들어졌다는 이 옷이, 런던의 한 가게에서 한국에서 온 내 손에 들리기까지 어떤 시간을 거쳐왔을까. 짐작조차 되지 않는 옷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 쌓인 물건들이 우리와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또 다른 이야기를 쌓아가겠지.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 물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빈티지의 묘미다.  


다음번 런던을 온다면 마켓만 다닐 거야.


런던을 떠나는 기차에서 영원에게 했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물론, 언제 이룰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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