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cook something together
한 달간의 영국여행 동안 우리는 총 7개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출발 전부터 계획한 것 중 하나는 우리가 묵는 모든 집들에서 최소 한 번씩은 직접 밥을 해 먹어 보자는 것이었다. 낯선 '생활'을 해본다는 컨셉에서 빠져선 안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에어비앤비를 통해 숙소를 예약할 때부터 부엌 사용이 가능한 곳을 필터링하여 찾아보았다.
그 첫 번째 장소 런던. 젊은 부부인 호스트의 자기소개글에서, 시간이 된다면 자신들과 저녁을 함께 먹는 것도 좋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집에서는 호스트와 시간을 맞춰 함께 식사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남편 Josh는 셰프 집안 출신에다 무려 이탈리아에서 요리 공부를 한 사람이라는 소개가 덧붙여져 있었기에 너무나 완벽한 계획이라며 우리 둘은 박수를 짝짝 치며 좋아했다.
우리가 묵을 날이 다가오자 체크인 시간을 확인하려고 언제 어떻게 도착하느냐며 메시지를 보내온 Hattie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의 계획에 대해서도 넌지시 운을 띄웠다. 그때 분명 의도한 것은 '넷이서 같이 음식을 해서 서로의 음식을 맛보자'였는데...
아무래도 "cook something together"에서 네 명의 투게더가 아닌 영원과 보람 투게더로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이후 시간 약속을 잡는데 왜 때문인지 본인들이 요리할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야, 우리는 너네 음식을 먹고 싶은 거야'라는 말을 뒤늦게 하기에는 뭔가 민망해진 상황에 우리는 큰 부담감을 떠 앉게 되었다. 그리하여 웃기게도 손님이 집주인들에게, 더더군다나 요리 전공자가 사는 영국인 집에서 한국 요리를 대접하게 되었다.
쫄지 말고 실력 발휘해보자
마침내 결전의 날, 요리 담당 보람의 고민이 깊어졌다. 서로의 음식을 나눠먹으며 공유해보려 했던 계획이 틀어지고, 우리의 메뉴만으로 한 끼 식사가 되어야 하니 양도 많아야 하고 취향도 가능한 맞춰야 하는 큰 숙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안 먹는 음식도 없고 매운 것도 좋아한다고 해서 큰 구애받지 않고 메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결정된 메뉴는,
외국인 대상으로는 실패할 경우가 거의 없다는 간장 베이스의 돼지불고기
그래도 한국 맛을 어느 정도는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에 김치볶음밥
혹시 둘 다 안 맞을 수 있으니 최소한 입이라도 달랠 수 있도록 샐러드
낮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렀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쌀과 가장 비슷한 느낌의 쌀을 샀다. Foreign 구역에서 간장Soy sauce을 사고, 고기와 샐러드 거리, 다음날 아침에 먹을 양식까지 풍성히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펼쳐 놓고 보니 한상 가득 재료가 쏟아져 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됐냐며 둘 다 허탈한 웃음을 내 짓다가 정신 차리고 실력 한 번 발휘해보자며 분주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조카의 생일 파티에 가지 못할 예정이라 미리 선물만 주고 오기로 했다며 주인은 자리를 비운 빈 집에서 열심히 요리를 했다. 쌀을 씻고 냄비밥을 지으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 통조림과 휴대용 고추장을 개봉했다. 내가 야채들을 씻고 썰고 샐러드를 만드는 동안 보람은 팬과 솥에 불을 올리고 메인 메뉴의 맛을 내기 시작했다. 널찍하게 구성된 조리대와 각종 향신료들을 보며 우리 집 부엌도 이랬으면 좋겠다고 연신 감탄을 쏟아내면서, 점점 완성되어가는 요리를 보고 있자니 긴장감은 사라지고 왠지 모를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Something smells soooo good
차가 막혀 조금 늦게 도착한 두 사람은 현관문을 열면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성큼성큼 들어왔다. 우리는 살짝 식은 음식을 다시 데웠다가 완성품들을 식탁으로 올렸다. (정신없이 손님맞이(?)를 하는 바람에 완성된 식탁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식탁에 둘러앉으며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인들 집에서 누가 요리를 해준 적이 없었다며 어색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보였다. '우리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라고 차마 얘기할 수 없어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혹시나 음식 맛이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요리를 공부한 Josh는 동양 음식들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미 고추장도 갖고 있을 정도였다. 자극적인 걸 좋아한다는 Hattie 역시 불고기는 말할 것도 없도, 김치볶음밥도 전혀 거부감 보이지 않고 착실히 그릇을 비워주었다.
우리와 비슷한 또래에, 결혼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신혼부부인 그들은 우리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았다. (런던에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현저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음식, 집, 결혼, 가족, 직장, 문화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어디를 갈지 고민하고 있던 우리에게 런던에서 볼 만한 곳도 추천받았다. (그렇게 방문했던 그리니치Greenwich는 정말 완벽한 선택이었다!)
영어가 그리 편하지 않은 보람은 (더군다나 영국 영어였으니) 긴긴 이야기가 마치고 상당한 피로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사는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이후 영국을 보는 데에도 좋은 인사이트들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특히, 겉만 보는 여행을 하다 보면 다 그만두고 그냥 이민 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지만, 결국 이곳도 삶을 만들어가야 하고 '생활'을 해야 하는 곳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었다. 똑같은 문제, 똑같은 고민은 어디서 사는가 보다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생길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싶다.
비록 이탈리아 유학파 요리 전공자에게 한 끼 얻어먹어보려 했던 알량한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덕분에 더 맛있고 뜻깊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성격상 낯선 이들과 대화하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 우리가, 대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덕에 요리도 대화도 더욱 알차게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의 서른도 한 발짝 자랐다.
적당히 낯선 생활 인스타그램 @our_unusual_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