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드 보통은 자신의 저서 <낭만적 연애와 그후의 일상>에서 결혼의 정의를 이와같이 표현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연애때나 신혼초에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 모른다. 도박이라니, 어림없는소리. 내겐 도박이 아니라 승률 100 프로의 게임이라고 확신했겠지. 경솔함은 본래 무지에서 비롯되는 법이니 말이다.
지난 10년 동안 연애-결혼-임신-출산-육아라는 통상적 루틴을, 통상적이지만은 않은 우리 부부만의 방식으로 잘도 채워왔다. 그 과정에서 다 알고있다 굳게 믿었던(그러나 전혀 알지 못했던) 나를 알아가고 또한 그를 알아가고. 실망도 존경도 서운함도 고마움도 다 켜켜히 쌓인 이제야 저 책의 글귀가 구절구절 와닿는다.
남편이라는 한 세계를 알아가며 나는 겸손을 배웠다. 내가 살면서 쌓아온 수많은 인연들을 난 내 방식, 내 세계 하에서만 이해하고 있진 않았는지 참 많이도 자문하게 되었다. 한 인간이라는 세계가 이리 깊고도 넓고도 너무도 입체적인데 나는 그동안 나만의 유니버스 그 틀에서만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고 있던것은 아닌지.
오랜 기간 넘치는 대화를 나누고, 수많은 여행을 함께 했으며, 우리를 반반씩 빼닮은 아이도 낳아 키우지만 여전히 그와 나는 서로를 매일 새로이 알아간다. 서로의 걸음에 발을 맞추던 그와 내 모습이 아닌, 각각이 30여년간 축적한 경험으로 덧입혀온 독자적인 세계에 대해 알아간다. 그 과정은 때론 유쾌하고 때론 쓰리지만 여전히 너무도 재미있다. 이토록 다른 두 세계가 만나 귀여운 아들에게 든든한 하나의 세계가 되어주고 있다는 이 놀라운 기적이.
도박판에서 나오기 전까지 판돈을 잃었는지 혹은 벌었는지 알수 없듯, 결혼도 관뚜껑 닫으며 조목조목 결산하기 전까진 그 누구도 잘했다 못했다 장담할 수 없다 생각한다.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신과 상대방이라는 변수를 다 고려할 수 있는 겸손함이 있다면 말이다. 다만, 현재 진행중인 지금, 우리가 할수 있는것은 우리 스스로의 선택으로 참여한 이 도박을 제로섬 게임이 아닌 윈윈게임이 될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는 일 그뿐이라는 것을, 나는 비교적 최근에 깨닫았다.
매 기념일 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세상 무용한 꽃다발을 ISTJ인 남편이 내가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사다 안기는 것을 나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본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때 비로소 에너지를 얻는 ENFP인 내가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것을 갈음하여 둘만의 오붓한 시간으로 결혼기념일을 보내는 것을 그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본다.
그리고 이토록 깨알같은 노력과 배려가 결국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잔잔히 남아 훗날 도박판에서 둘다 웃으며 손붙잡고 떠날수 있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한 가치를 아는 너라서, 또 나라서 다행이다.